[글로벌 포커스-김승렬] 한국전쟁과 유럽

국민일보

[글로벌 포커스-김승렬] 한국전쟁과 유럽

입력 2010-03-1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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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발발 60주년이 되는 한국전쟁은 소련, 미국, 중국, 한국 등 직접 당사국에서와 달리 유럽에서 ‘잊혀진 전쟁’이다. 그들에게 2차 대전이 직접적이었다면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전쟁은 68 학생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친 식민지 해방 투쟁이었다. 한국전쟁은 이 사이 어딘가에 애매하게 끼여 있다. 유럽 국가의 식민지가 아니었던 한국의 전쟁은 단지 소수의 유럽인들만 참여했으며,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의 역사적 파장이 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한국전쟁이 유럽과는 별반 상관없는 것이었나?

적대국 간 화해 끌어내

서유럽은 한국전쟁을 북한의 남침이고 그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보았다. 1949년 소련이 원폭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핵무기는 서유럽을 지키기에 충분치 않아 보였다. 반면 소련의 지상군은 서유럽의 지상군 모두를 합한 것보다 많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 해방 투쟁을 진압하느라 대규모의 지상군을 파병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합법 정당일 뿐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도도 적지 않았다. 소련이 마음만 먹으면 동아시아의 상황이 유럽에 재현될 수 있다는 절박한 위기감의 배후에는 바로 이런 사정이 놓여 있었다.

한국전쟁의 힘은 대단했다. 1차 베를린 위기를 겪은 미국은 서독의 재무장을 전제로 한 서유럽 군비강화(NSC-68)를 구상했지만 실행할 수 없었다. 나치 독일에 대한 적대감이 서유럽인들에게 아직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소련의 위협을 이보다 더 위험스럽게 보이게 했다. NSC-68이 실행되어 ‘종이호랑이’였던 나토는 실질적 방어능력을 갖춘 군사기구가 되었다. 서독의 정규군도 결국 부활했다.

한국전쟁은 프랑스와 독일의 오랜 숙원을 봉합했고, 오랜 적대국이던 그리스와 터키를 1951년 나토에 동시에 가입할 수 있게 했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독재국가 스페인은, 비록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한국전쟁 지원을 통해 미국과 외교적 관계를 맺으려 했다. 공산 국가이지만 소련과 결별한 유고에게 한국전쟁은 소련의 침공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유고는 소련과 달리 남침설을 지지하여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냈다. 영국과 프랑스는 한국전쟁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이 지역의 민족해방투쟁을 자극했을 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가 민족해방투쟁 진압을 냉전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더 강화된 동서 냉전 구도

반면, 동구권 국가들은 북침설을 맹신하고 반미 정서를 선전함으로써 군비 강화를 위한 심리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미군은 이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1951년 초 소련이 동유럽의 군비증강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위기감 덕이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응한 군비강화는 바르샤바조약기구 설립으로 귀결됐다. 이와 동시에 소련은 평화주의 공세로 서유럽 내부에 침투했다.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소련은 독일의 재군비 포기와 통일 독일을 맞바꾸는 빅딜, 독일 중립화 통일을 제안했다. 반나치 레지스탕스의 주도세력인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나치 독일’의 재군비를 반대하며 체제 간 평화공존의 기치로 세를 집결했다. 하지만 남침 사실에 근거하여 소련의 평화공존 논리의 내적 모순에 갈등하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었다. 이들이 결국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스탈린의 계산과 달리, 서유럽의 공산주의 세력은 약화되고 말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의 유럽은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핵무기로 균형을 유지하는 무장된 평화 체제가 공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3차 대전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상대 진영을 건드릴 수 없는 체제가 되었다. 어느 냉전사가가 재치 있게 지적했듯이, 유럽의 ‘긴 평화’는 이렇게 형성되었다. 한국전쟁은 유럽에서 ‘잊혀진 전쟁’이지만 유럽 냉전의 구조를 단단하게 만든 열전이자 국지전이었다.

김승렬 경상대 유럽현대사 교수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