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대원 (7) 성경공부 모임 발전 예수전도단으로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역경의 열매] 오대원 (7) 성경공부 모임 발전 예수전도단으로

입력 2010-07-12 20:52
  • 미션라이프 카카오플러스 친구등록하기

기사사진


우리가 서울공대 기독학생회로 돌아간 1972년 10월, 계엄령이 내려 지방에 살던 학생들은 집으로 내려가고 그곳엔 다섯 명 가량의 학생만 남아있었다. 나라가 어수선한 시기였지만 그로 인해 젊은 지성들은 더 예배에 집중했다.

학생들은 서울공대 앞에 있던 우리 집에서 날마다 6시간 정도 기도와 찬양, 성경공부를 했다. 다섯 명의 학생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았고 예배 중에 병 고침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 퍼지자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생들도 공릉동에 있는 우리 집에 모이기 시작했다. 10명에서 30명, 50명, 나중엔 100명의 학생들이 늘어났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등의 외국 찬양곡을 많이 불렀다. 당시 서울공대 학생이었던 김성수(현 총신대 교수)씨가 번안을, 현요한(현 장신대 교수)씨가 찬양인도를 은혜롭게 잘했다. 악기는 기타 하나였지만 찬양은 회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모임이 커지면서 서울대학교 연합기독학생회와도 관련을 맺었다. 집에는 데모하다 온 학생도 간혹 머물곤 해 형사들이 찾아와 모임을 감시하는 일도 있었다. 우린 집회에 참석하는 형사들을 오히려 환영하며 공개적으로 초청했다.

매주 화요일마다 집에서 드리던 예배가 교회에 알려지면서 이름이 필요했다. 예수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우린 예수원에서 ‘예수’를 따서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 전도하는 모임이란 의미를 포함해 ‘예수전도단’이라고 지었다. 1973년 예수전도단이라는 공식적인 이름이 선포됐다.

이후 예배 장소는 서울 연희동 외국인학교 내 수양관, 서울역 앞 여성절제회관을 거쳐 77년에는 명동 YWCA회관 강당으로 옮겨갔다. 명동시절엔 2000명가량이 모였다. 강당 의자는 450석뿐이어서 앞에는 돗자리를 깔고 앉았으며 복도와 뒤편까지 모두 꽉 찼다.

그때 왜 그렇게 많은 회중이 모였을까? 그것은 우리의 모임은 성령 충만한 젊은 평신도들의 지도력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한국이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열심히 기도하며 선교 열정을 불태웠다. 이후 모임에서 세계로 선교하러 가는 수많은 목사와 선교사들이 배출됐다.

사실 우리가 화요일에 모이는 이유는 수요예배와 금요철야가 있는 교회사역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 화요모임을 통해 예배와 기도, 말씀과 교제가 어우러진 현대적 예배가 시도되고 미국에서 들여온 복음성가가 예배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당시 일어서서 박수를 치며,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은 예배 형식의 파격적인 혁명이었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모이고, 교회와 열방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젊은 그리스도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 우린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했다. 당시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역시 파격적인 것이어서 많은 대형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예수전도단 화요모임에 가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가 모일 때마다 예수님 영접, 성령세례, 치유가 행해졌는데 하나님께서는 매번 놀랍게 역사하셨다. 연희동에 있는 수양관에서는 매일 아침 6시 성경공부가 열렸는데 먼 지역에 사는 학생들도 찾아왔다. 우린 학생들과 함께 먹고 자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문득 예전에 대천덕 신부님이 “성령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은 세계의 누구든지 한국에 오면 수양관을 찾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갓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