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변영인] 인생의 가을에서…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변영인] 인생의 가을에서…

입력 2012-10-16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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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모 방송국에서 갱년기에 대한 특강을 청해 왔다. 녹화를 위한 이런저런 준비 중 잠깐 삶에 대한 생각에 잠기게 됐다.

밀림 속을 걷는 사람이 자기가 길 잃은 상태에 관심을 갖지 않고 행진만 계속한다면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미로에 서서 상실된 상태를 받아들이기보다 그대로 행진만 하려고 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그것처럼 인생의 낭비가 있을 수 없다.

떠난다고 해서 다 본향으로 가는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한 삶, 떠나기 위한 떠남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인생이라는 번호표를 단 버스를 깨닫지 못하고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의 몇 번 버스를 탔는지,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를 알 수 없을 때 먼저 우리는 하루하루를 최후처럼 살아야 한다.

단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인생의 버스는 타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하기 위해서 곧, 내리기 위해서 탄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큰 강이 처음부터 큰 강은 아니었다. 강이 강으로 태어날 때 그것은 미미한 물줄기, 작은 웅덩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굽이치고 말없이 지나온 들판과 계곡에서, 이곳저곳으로부터 모여든 샛강에서 큰 강을 잉태해 낸다. 그 강이 도시의 한복판을 흘러갈 때 헤아릴 수 없는 오물이 합류하게 된다. 그 불결함의 극치는 강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흐르고 흐르는 사이에 흡수되고 앙금이 가라앉아 맑은 강으로 소생하며 다시 흐르고 있는 모습에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서 함께 마시고 헤엄쳐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의 경험, 개인의 일생을 강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극히 미미한 데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쉼 없이 지금까지 흘러온 것이다.

그 길이와 깊이와 넓이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온갖 것에 부딪치고, 합류하고, 떠나오면서 오염되고 불결해진다. 어느 한 지점에서는 아무도 헤엄쳐 갈 수 없고, 아무도 목마름을 위해 마실 수 없고, 물고기도 살 수 없는 형편에까지 이르고 만다. 그러나 그 웅덩이에서 죽지 않고 썩음을 거부하고, 흐르기만 한다면 강은 소생하고 만다. 웅덩이에서 안주하지 않으면 새롭게 된다.

내 생물학적 나이의 숫자만 의식할 것이 아니라 갱년기, 그 성숙의 아름다움도 다시 기대해 본다.

변영인(동서대 교수·상담심리학)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