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태만] 선비와 교수, 폴리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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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김태만] 선비와 교수, 폴리페서

입력 2012-11-2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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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의 사대부 즉, 선비(士)의 인생 목표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이었다. ‘전란의 시대에는 장수가 되어 나라를 구하고, 평화가 오면 재상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것’. 국가에서 치르는 ‘국가공인 인재발탁 시스템’인 과거(科擧)가 탄생하고부터 청년들은 꿈과 이상 실현을 위해 일생을 학문에 매진했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이상 실현이었기 때문이다. 과거가 폐지되고 근대적 교육기관이 출현한 이래 학문의 최고 경지는 박사를 수여받고 교수가 되는 것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대학의 교수를 전통시대 사대부와 견줄 수 있지 않을까.

학문과 교육의 상징인 공자가 계환자의 요청에 응해 관직에 나가면서 “정치란 바로잡는 것(正)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 ‘공명정대(公明正大)’한 행정 실천을 각오했다. 특정 보스에게 충성하는 사적(私的) 신하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공직(公職)인 바에야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사람이 맡는 것은 당연지사다. 과거 군주들이 그랬듯 오늘의 국가 지도자 역시 천하의 영재를 얻어 정사에 참여시키고자 할 것이다. 일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훌륭한 학자나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권장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학자와 정치가 이분법적으로 분절된 지 오래다. 학자나 전문 지식인이 지닌 지적 자산의 정치적 활용을 차단시키려 하는 관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덕목이나 ‘위기에 맞서 생명을 바치고, 이익에 앞서 정의를 생각한다’는 장자(莊子)의 사(士) 정신마저 희화화시켜 버린다.

특히 정치에 대한 대학사회의 냉소주의는 도를 넘었다. 정치적 행위나 발언을 하는 교수를 쉽사리 ‘폴리페서’로 매도한다. 물론 사리사욕이나 곡학아세로 정치를 사용(私用)하는 ‘폴리페서’가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지식인의 본분과 사명을 위해 행하는 정치적 발언이나 실천마저 폄훼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대통령을 뽑는 일은 일개 대학의 총장 선출보다 중차대한 일이다. 총장 선거에 그렇게 열을 올리던 교수들도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의사 표현에 인색하다. ‘학자가 정치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궁색하다. 신분이 드러날 경우 입을지도 모를 승진이나 용역 수주에서의 불이익을 걱정해서일 게다. 설령 제도의 폐해를 인정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상징이랄 수 있는 총장 직선제가 멸절되고 말았지 않나. 이런 일을 당하고도 정치 참여를 두려워하는 교수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치는 나와 우리 가정,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과 사회, 나아가 국가의 운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장치다. 때문에 정치란 공기와 물, 그리고 우리의 몸과 같다고도 한다.

아무리 결핍되어도 물과 공기 없이 살 수 없고, 그 누가 겁박해도 신체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내 삶의 최소한의 권리를 특정 세력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면 정치를 직시해야 한다. 정치를 정치인에게 맡긴 폐해를 상기해 보면 외면하거나 부정할 일이 아니라 더욱 더 깊이 참여하고 간섭해야 할 일이다.

어떤 지식인이 정치를 방기하는가? 어떤 세력이 지식인의 정치 방기를 고대하는가? 억압받고 억눌려도 안분자족하는 지식인들이야말로 부평초와 다를 바 없는 존재일 뿐. 어쩌다가 지식인들이 자기검열과 자기거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머슴 근성에 젖어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게 되었는지.

교수된 자, 더 이상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는가. 정치가 당신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지 않는 당신이 정치를 망칠까 두려울 따름이다. 천하의 도를 밝히고 세상을 바로잡고자 실천하는 자가 진정한 학자가 아닐까.

김태만 한국해양대 교수 동아시아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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