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박수근 화백의 생일

국민일보

[내일을 열며-이광형] 박수근 화백의 생일

입력 2014-03-01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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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국민화가 박수근을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생몰연도가 ‘1914년 2월 21일∼1965년 5월 6일’로 나온다. 태어난 날을 2월 21일로 기록한 것은 박 화백의 친필 이력서와 아내 김복순 여사의 회고록을 토대로 했다. 이 날짜를 음력으로 환산하면 1914년 1월 27일이 된다. 하지만 박 화백의 실제 음력 생일은 1월 28일이다.

아내는 남편의 일생기에서 “나도 그이 생일날이면 손수 뜨개질을 해서 보내곤 하였다. 그이의 생일은 음력 정월 28일이었다”고 적었다. 또 아직 생존해 있는 박 화백 제수씨도 음력 1월 28일 박 화백의 생일잔치를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박 화백이 태어난 날은 양력 2월 21일이 아니라 22일이 맞는다.

그럼에도 2월 21일로 돼 있는 것은 박 화백과 아내가 음력을 양력으로 계산하면서 하루 빠른 날짜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에는 양력보다 음력이 보편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박수근미술관은 지난 27일(음력 1월 28일) 오전 11시30분 미술관 근처의 박 화백 부부 묘소에서 박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행사에는 아버지를 이어 화가로 활동 중인 장녀 박인숙(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씨와 장남 박성남씨, 손자·손녀와 친인척 등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박 화백이 평소 좋아하던 백합을 묘소에 헌화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 화백 부부에 대한 추도예배로 진행됐다. 미술관은 앞으로 음력 1월 28일을 박 화백의 정식 생신기념일로 삼기로 했다.

박 화백은 1남3녀 중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위로 딸만 셋이 있어 간절했던 아들이었기에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뜻으로 이름을 ‘목숨 수(壽) 뿌리 근(根)’으로 지었다. 일곱 살에 양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림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당시 밀레의 ‘만종’을 도판으로 처음 보고 “하나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18세가 되던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해 입선한 것을 계기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빨래터’ ‘시장 여인들’ ‘농악’ ‘노상의 사람들’ 등 300여점을 남겼다. 지병인 간경화와 응혈증이 악화된 그는 65년 5월 6일 새벽 1시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국민화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일구었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우리 이웃과 가족을 향한 따스한 시선과 풍경이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평가다.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3월 16일까지 열리는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관람객들이 몰려드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박 화백은 자신의 작품 진위 논란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국내 미술품 경매에서 최고가(45억2000만원)를 기록한 ‘빨래터’의 경우 “위작으로 볼 수 없다”는 법정 판결이 나왔으나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일부 목판화도 박 화백 사후에 찍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위작을 진품으로 속이는 것도 나쁘지만 진짜를 가짜로 만드는 것은 더 나쁘기 때문에 위작 제기는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국내에는 공인된 미술품감정기구가 없어 진위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주장이 난무한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생일 날짜를 바로잡고 행사를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연구하는 작업도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