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경기도 김포 월곶과 '십자가 정신' 박용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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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경기도 김포 월곶과 '십자가 정신' 박용희 목사

입력 2017-08-11 16:12 수정 2017-08-1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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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성령에 의지해 기도한 기독교인들의 고난과 노고가 있었다. 한눈에 세상 권력의 지형이 조망되는 옛 통진읍성의 풍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1일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통진향교 일원. 공자를 기리는 향교와 좌우로 유현(儒賢)을 배향하는 동무와 서무, 그리고 위계를 분명히 한 옛 건물 3동이 계단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은 공자의 제사를 지내고 섬기기를 500여년간 계속했다. 성리학적 통치 이데올로기가 부패하면서 20세기 초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전통 건축유산이 철거되고 파괴됐으나 ‘공자묘’로 불리던 향교만은 살아남은 곳이 많다. 제사에 대한 인식 체계가 ‘보존’을 낳은 듯하다.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박용희 목사가 검거를 피해 은신 중 경기도 통진향교 앞에 나타나 조선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독립투쟁은 대한민국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향교 입구 옛 월곶중 운동장 터에 적치된 폐산업기계와 그 뒤 향교‧교회 건물이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하다.

향교 앞 목사의 독립만세 운동 
1919년 3월 22일 오후 2시 월곶 군하리 통진향교 앞. 수백명의 군중이 이 향교 앞에서 조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목사 박용희(1883~1959), 여자 신학생 이살눔(1886~1948) 등이 주도한 시위였다.

3‧1운동 직후 경성지방법원은 그날의 만세시위 참가자 이병린과 성태영에 대해 이렇게 판결했다. “군하리 시장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매 박용희란 자와 공모하여 군중을 선동하여 만세를 부르게 함으로써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하려고 기도하였다.” 

당시 판결문에는 “통진 장날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데 박용희가 와서 공자묘로 가서 독립운동하라 하여서…”라는 대목도 들어 있었다.

훗날 한국 교계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기록되는 박용희가 통진읍성 앞에서 대한독립을 외쳤다. 서울 연동교회 게일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연동교회 조사로 사역을 시작한 박용희는 당시 조선의 지성이 다 모였다는 연동교회의 핵심 리더였다. 이상재 함태영 이원긍 박승봉 최남선 이갑성 신마리아 신의경 김필례 민준호 등 근대사의 굵직한 인물들이 이 교회에서 함께 어울리던 무렵이었다.

연동교회는 조선장로교 경기노회의 장자교회였다. 경기도 안성 용인 김포(옛 통진군 포함) 등지에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지원했다. 박용희는 농촌운동을 겸해 이들 지역에서 예수 복음을 전했다. 3‧1운동 전 강화도에서 국채보상운동을, 통진에서 부업장려운동을 벌였다.

그날 향교 앞에 모인 백성은 주재소, 면사무소, 시장통을 돌며 만세삼창을 계속했다.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는 시위 주동자들이 ‘주재소 순사보 이성창에게 당신은 조선인이니 독립만세를 외치라고 했고 듣지 않자 폭행을 휘둘렀다’고 나타나 있다. 면서기 조원석 외 3명에게도 만세삼창을 주문했다고 적혔다. 시위로 주모자 10여명이 연행됐다. 시위는 28일에도 이어졌다.

1955년 충남 대천 교역자수양회에 참석한 박용희 목사(파란색 원).

박용희는 1914년 일제에 의해 강제 통폐합된 통진의 3‧1운동 현장에 나타났지만 사실은 3‧1운동 주도자 33인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조직가였다. 일경 입장에선 만세운동 자금을 관리하는 핵심 배후였다. 박용희는 월곶 만세운동 전인 3월 8일 서울 종각 앞에서 직접 나서 2차 만세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통진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현장은 한국사와 한국기독교회사의 축소판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성도(聖都)였던 강화 문수산성이 있던 통진군, 그리고 한양도성과 강화유수를 잇는 길목의 통진읍성(현 월곶 면소재지 일원)은 북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어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배를 타고 오르내리며 복음을 전한 곳이다. 김포읍교회, 송마리교회, 누산리교회 등이 이 무렵 개척됐다.

그렇지만 향교로 상징되는 조선은 끝내 망했다. 통진향교 옆 위풍당당하던 동헌과 이청, 사령청, 화약고, 향청 등 조선 관아는 일제에 의해 쓸려 나갔고 그 자리에 주재소와 황국신민을 위한 교육기관 보통학교(현 월곶초교)가 들어섰다. 보통학교는 1908년 한국 기독교계가 설립한 분진학당이었으나 1910년 강점과 함께 빼앗겼다.

1885년 이후 언더우드와 게일, 김포‧통진 교인들은 통진 읍내에 복음을 전하려 한다. 하지만 향교가 있는 곳에 야소교 회당 불가라는 양반세력에 밀려 결국 읍 외곽에 예배당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근대적 행정관청은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해방 후 보통학교가 우리 교육의 산실로 회복됐고, 중학교가 향교 입구에 세워졌다.

민족이 살길은 민족복음화뿐
한편 일경은 3‧1만세시위 사건의 기독교 측 총잭이 박용희라는 걸 파악하고 검거에 나섰다. 월곶 만세운동 직후 이상재(기독 독립운동가)가 화급히 박용희를 찾았다.

“자진 입옥한다는 말은 막막불가하오. 그러니 즉시 국외로 탈출하시오. 그래야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 아니오.”

김포시 월곶면 삼일만세기념공원 내 기념비석.

박용희가 동지들이 자신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알고 자수하겠다고 하자, 이상재는 이렇게 만류했다. 박용희는 결국 소금장수를 가장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상하이와 만주를 돌며 무력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다 일제의 문화통치 간교를 듣고 기도하던 중 깨달았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날 길은 오직 민족복음화뿐이다.”

1920년대 초 민족복음화를 위한 한국 기독교 문화운동의 효시로 불리는 창문사 설립은 박용희에 의해 이뤄졌다. 그는 동시에 사역도 이어갔다. 경기 안성교회, 서울 승동교회, 전남 목포중앙교회와 순천중앙교회 등에 부임해 구령에 힘썼다.

복음화를 위한 불굴의 정신은 1940년대 한국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타협할 때 목숨을 건 거부로 이어졌다. 1942년 체포된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3년여를 광주교도소에 갇혀야 했다.

1966년 딸 박숙정(작고)이 남긴 교도소 면회 기록. “붉은 수의에 용수를 쓴 아버지가 내게 용수를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벗어 누르퉁퉁하게 부은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실 뿐이었고… 안경 너머로 글썽거리는 눈물이었다. 나는 조심조심 집안일과 교회 일을 알려 드렸다. 5분 후 간수가 ‘그만’하고 외쳤고 아버지가 먼저 나가라고 내게 애원하듯 손짓했다.” 

박용희 목사(1883~1959)

20대 때 서울 연동교회에서 세례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 일본성서학원과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했다. 연동교회 승동교회 영등포교회 등 유수의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신사참배 거부로 3년여 동안 투옥됐다. 국채보상운동, 농촌계몽운동, 신간회 활동, YMCA 활동 및 민립대 설립운동, 문서선교 창문사 설립, 예수교연합회공의회 등 교회연합운동을 이끌었다. 

또 피어선기념성경학원(평택대 전신),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의 설립과 운영에 크게 기여했다. 해방 후 김구 안재홍 등과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다.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포=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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