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이일선 목사(하)] “괴로운 짐 나도 같이…” 슈바이처에게 위로받다

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이일선 목사(하)] “괴로운 짐 나도 같이…” 슈바이처에게 위로받다

입력 2017-09-08 15:51
취재대행소왱
이일선 목사가 울릉도를 의료선교지로 정하고 떠난 이유는 이러하다.

이일선 목사 부부

1957년 9월 어느날 이 목사는 경북 포항 성심수녀원이 돌보는 한센병 환자 300여명의 진료를 마치고 간호사 자격을 갖춘 벨레뎃다, 라파엘 수녀와 함께 울릉도의 한센병 환자와 결핵환자를 돌보기 위해 목선 용마호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20~40시간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그러나 태풍으로 3일간 표류하다 역풍으로 천부 해변에 닿았다.

‘나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내 생명은 당신의 것입니다. 이곳에 의사가 없습니다. 내가 여기서 일하겠나이다.’(1975년 9월 27일자 ‘크리스챤신문’ 인터뷰 기사 중)

서울 신일교회 김성복 장로와 이장진 안수집사가 1960년대 울릉도병원 천부 분원에서 이일선 목사로부터 치료받았던 할머니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울릉도 진료 가다 북한 해역 표류
지난 광복절 울릉도 북면 천부항. 인적 끊긴 면소재지였다. 태극기가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등의 깃대봉에서 펄럭거렸다. 천부에는 1961년부터 의료사역을 시작한 이 목사가 세운 울릉병원 천부 분원이 있었다. 주민들은 옛 천부분원 자리를 알지 못했다. 경로당을 찾아 더위를 식히는 노인들에게 묻자 “이일선 목사님 병원아인교”라고 답했다. 2~3명이 부리나케 안내했다. ‘약방댁’ 손모(88) 할머니 등이었다.

일자형 분원 옛 건물엔 관절통으로 걷기조차 힘든 손순금(82) 할머니가 홀로 살았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죠. 어떻게 목사님을 아신데요. 맹장 고쳐 주고, 산부들 치료해 주신 훌륭한 선생님이셨죠. 그때만 해도 우리가 젊었을 때였어요. 우리 자식과 마을 사람들 다 그분 덕 봤어요.”

1955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이 목사는 1960년 5·16 쿠데타 총성을 실제 들으며 전 가족과 함께 울릉도로 향했다. 군사쿠데타로 모든 사회시스템이 중지되는 바람에 포항에서 일주일 이상 묶였다. 그해 6월 1일 울릉군청 소재지 도동에 셋방을 얻어 울릉병원을 개원했다. 도동서 가까운 저동 분원과 천부 분원은 60년대 초 개원됐다.

당시 울릉병원(현 울릉호텔)에서 천부 분원까지 자동차길이 없었다.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파고가 높으면 중병이 걸린 마을사람들은 나리분지를 통과해 4시간여를 걸어 본원에 닿을 수 있었다. 손 할머니는 마을 아낙들과 걸어서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고 했다.

울릉병원 본관의 현재 모습. 울릉호텔이 됐다.

‘약방댁’ 약방은 약사 면허체계가 확립되지 않았던 섬 오지마을의 유일한 양약 의료기관이었다. 사람들은 무당을 찾아가 길흉화복을 점쳤다.

병원 개원에 전래 한의원 등이 반발했다. 이러한 배척은 두고두고 이 목사의 기도제목이 된다. 그들은 무료 의술을 베푸는 그를 두고 저의를 의심했다. “국회의원 되려고 선심 쓰고 있다” “울릉도 돈을 다 쓸어 나갈 것”이라는 악소문이 돌았다. 또 복음전도, 공중보건과 식생활개선운동, 사회사업 등도 공격대상이 됐다. 적어도 1965년까지 이러한 공격은 노골적이었다.

울릉도민들은 안타깝게도 뭍에서 존경받은 목사이자 의사였던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뭍에선 세계 의학계가 다 아는 의료선교사 이일선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안타까워 슈바이처가 그에게 보낸 1962년 편지다. ‘당신의 괴로운 일이 무엇이오. 당신의 괴로운 일을 내게 말하시오. 당신의 괴로운 짐을 나도 같이 지게 해주시오.’

슈바이처의 편지 ‘당신 짐을 같이 지게 해주시오.’
광복절 전 날 울릉읍 저동 항구. 오래된 나무 한 그루 뒤로 흰 페인트칠을 한 신흥교회 예배당에 눈이 갔다. 기품 있는 나무와 소박한 예배당. 한데 그 나무가 눈에 익었다. 이 목사의 사역을 존경했던 일본인 의사 이사오 다카하시 박사(당시 일본슈바이처재단)가 남긴 자료 사진 한 장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사진 속의 나무는 몇 백 년 됨직한 바로 저 후박나무였다. 후박나무 뒤로 ‘저동울릉도의원’이라는 아치형 간판이 선명했다. 저동 분원 터와 천부 분원은 이로써 확인됐다.

도동 본원 확인에도 나섰다. 당시 병원 총무로 일했던 김춘화 울릉군 산림조합영림단장이 안내했다. 사택과 병동 일부는 울릉군 공영주차장이 됐고, 사택 2채가 본동(울릉호텔) 뒤로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 단장은 “뭍에서 온 의사와 미국 등지에서 온 의료선교사들이 묵는 곳이었어요. 당시 울릉도민은 꿈도 못 꾸던 보일러시설이 된 건물”이라고 소개했다. 울릉도는 모래가 없어 뭍에서 운반해야 건축이 가능하다. 병원 건축 당시 철근은 부산 동래에서, 모래는 강원도 묵호 등지로 실어 날랐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세계봉사회, 세계 의료선교사와 그 후원자들의 기도와 기부가 힘이 됐다. 조향록 강원룡 목사, 철학자 안병욱 김형석 등도 다방면으로 도왔다.

이 목사의 사역 초기 울릉도 인구는 2만7000여명. 교회는 30~40개였으나 교회 다니는 이들조차 고기잡이 나갈 때면 성황당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면서도 구원파, 통일교, 전도관 등이 세를 구축한 곳이기도 했다.

그가 사역을 시작한 후 800여명의 결핵환자는 300여명으로 감소했고, 68명이던 한센병 환자는 4명으로 줄었다(1976년 기준). 과부나 고아, 독거노인 등 환자의 3분의 2는 무료진료 환자였다. 그는 현지 교회가 불편하지 않게 목회자가 없는 곳만 골라 다니며 순회설교를 했다. 저동 와달리에는 교회를 세워 전도사를 파송했다. 병원에선 매일 예배가 있었고, 모든 일정은 기도로 시작됐다.

그 무렵 울릉도 생활환경은 요즘 동남아 선교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창한 날이 연 50일에 불과한데다 위생관념 부족으로 인한 발병이 많았다. 그는 결핵환자의 단백질 공급 등을 위해 산양과 토마토 등을 들여와 보급했다. 햇볕을 많이 쬐도록 창문 개량도 권했다. 우물과 변소 개량 등의 계몽운동도 벌였다.

저동 분원 현재 모습. 신흥 교회가 들어서 있다.

또 이길화 사모(2005년 작고)는 밀가루와 구호양곡을 배급했고 무의탁노인에게는 생활보장기금, 불우청소년에게는 장학기금을 지급했다.

이 목사는 아내의 권유에 따라 ‘자급전도’를 위해 의사가 됐다. 그는 결핵, 나병, 기생충, 약물중독 문제의 해결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고 무엇을 전문분야 삼을지 기도했다. 모두 피하는 분야였다.

“한센병 환자를 위해 일해야 된다는 하나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가족과 의논해봤으나 거부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같은 음성이 계속됐고 주의 음성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하겠나이다, 내 가족이 모두 문둥이가 돼도 좋습니다’고 고백하고 결단을 내리니 마음의 기쁨이 오고 십자가의 의미에 눈을 뜨는 것 같았다.”

이렇게 회고(1975년)한 기록이 남아 있다. 5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한센병 환자는 10만명이 넘었다. 그는 소록도 등 전국을 돌며 주 4일 헌신했던 것이다.

욥처럼 환자의 삶 속으로
선교지의 영광과 고난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쉬지 않는 심장을 가진 이일선 부부를 환자로 만들어 쉬게 했다. 각기 척추디스크와 골반골절로 1973년 이후 수차례의 대수술을 받았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부부는 지팡이를 짚은 채 싱가포르 ‘세계기독의사회’ 등에 참석했다. 이 목사는 수술을 위해 찾은 미국에서의 교통사고, 이어진 성대종양 등으로 회복하지 못했다. 잇따른 고통에 “하나님께서 내가 욥과 같은 고통 중에서도 신앙을 붙잡고 있는가 시험하고 계신다. 우리 부부가 끝까지 생각한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하시다는 것”이라는 투병기를 남겼다.

그는 슈바이처가 말했듯 디모데였다. 당시의 한국 교계와 한국사회가 감당하기엔 너무 깊은 강물이었다. 한센병 환자를 돌보면서도 한국교회 분열을 안타까워했던 그는 오지에서 순교적 삶을 살다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눈물겨운 한마디. ‘등에는 십자가가 있다. 그러나 입에는 노래가 있다.’ 


[이일선 목사 며느리 장은실 권사]
“시부모님은 욥의 고통과 같은 고난에 힘들어 하셨다”


지난 4일 이일선 목사의 자부 장은실 권사(64·서울 한우리교회)를 서울에서 만났다. 장 권사는 1977년 남편 이대열(65·의사)씨와 울릉도 저동 분원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1962년 10월 10일 울릉도를 방문했을 때 달갑지 않게 대하며 핍박했던 일화, ‘마약 무고’사건 등을 털어놨다. 서울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장 권사는 세계 각국에서 매년 9월부터 쏟아지는 성탄카드와 1~2달러 후원금 등을 정리하는 등 국제비서 역할도 했다.

1962년 10월 10일 울릉도를 방문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가운데)과 저동 촛대바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이일선 목사(왼쪽). 오른쪽은 박창규 울릉군수.

“시어머니와 함께 환자 피 빨래를 참 많이 했어요. 선원들이 자상을 입고 오는 경우가 흔했거든요. 시부모님은 1973년을 전후로 욥의 고통과 같은 고난에 힘들어 하셨어요. 아버님은 73년 일본에서 열리는 농촌의학회 참석차 떠나던 날 척추디스크가 발병했어요. 어머님은 이듬해 피 빨래를 하러 지하 계단을 내려가다 미끄러져 골반이 다쳐 주저앉다시피 됐어요. 무엇보다 아버님이 그토록 심혈을 쏟던 본관이 90% 이상 완공됐는데 누군가 마약을 팔고 있다고 고발한 거예요. 경주지청에서 한 달간 상주하며 조사를 벌였어요. ‘목사님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떠났지만 아버님은 급격히 기력이 쇠하고 말았어요. 슈바이처 박사가 계시던 아프리카로 가 그들을 돌보며 살고 싶다고 하셨죠.”

울릉도=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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