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신사참배 거부한 단구의 거인, 끝내 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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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신사참배 거부한 단구의 거인, 끝내 쓰러지다

입력 2017-11-1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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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현속 장로가 섬겼던 경남 함안 옛 부봉교회당. 이 장로의 아버지 이수목 목사에 의해 1906년 설립된 이 예배당은 한국 초기 교회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1990년대 초까지 사용됐다.

실개천 옆으로 늙은 소나무가 늘어섰고 사이사이 한옥이 자리했다. 실개천 다리 건너편엔 노인정이 있다. 한옥 뒤는 안산으로 불린다. 안산 산자락까지 가을이 앉았다.

교회는 다리 건너기 직전 왼쪽에 자리 잡았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한 시골교회였다. 주탑을 양쪽에 두고 중앙을 출입구 삼았다. 50~100명이 예배드리기 적합한 규모였다. 예배당 바로 옆으로 60㎡ 단층 사택이 들어서 있다. 교회 건물과 사택 주변은 주차 편의를 위해 시멘트 포장을 했다. 교회 부지는 실개천을 끼고 있었고, 그 개천을 따라 감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하늘은 청명했다.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 주말 경남 함안군 산인면 부봉리 부봉교회 풍경이다.

순교자 집안의 6대째 신앙
부봉교회는 1906년 설립된 역사적인 교회다. 서부경남 일대의 산이 험준해 신작로조차 제대로 없었던 때에 어떻게 이런 교회가 성립됐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감나무 군락에서 똑똑 감가지 꺾는 소리가 났다. 다가가 보니 이 교회 이충길(72) 은퇴장로 부부였다. 아내 노명점(65) 권사와 함께 감을 수확하고 있었다. 이 장로는 이 교회 출신 순교자 이현속(1900~1945) 장로의 손자다. 이현속은 일제 강점기 신앙적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평양형무소에 투옥돼 그곳에서 숨졌다.

이현속 장로(1900~1945)

구술과 사료에 따르면 이현속 장로는 왜소했다. 그의 아버지 이수목(1871~1952·부봉교회 영수)도 그러했다고 전한다. 이충길 장로도 큰 키는 아니다. 이 3대의 뼈대 얘기를 하는 것은 이현속의 구원의 확신 때문이다. 단신의 그는 바알 우상 앞에 절대 머리 굽혀 숭배할 수 없겠노라며 고난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았다. 숱한 매질이 이어졌고, 추위와 굶주림이 그의 육신을 피폐케 했으나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 썩은 음식을 먹으며 주님 오실 날을 기다렸다.

기독교역사학자 이상규 교수(고신대)는 한국의 기독교 순교자를 1000~2000명으로 보고 있다. 대개 6·25전쟁 중에 순교했기 때문에 정확한 산출이 어렵다고 했다.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가 확인한 순교자는 200여명이다. 손양원 이기풍 주기철 최상림 목사 등이 귀에 익숙하다.

한국기독교향토사가 조헌국 장로(전 진주시 교육장)가 말하는 이현속은 함안 산골 농부의 아들이었다. 아마 신앙을 갖지 않았다면 농사를 짓거나 대처에 나가 범속한 삶으로 한평생을 마쳤을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중심에 예수가 박혔다. 그는 엘리야가 세상을 향해 “분명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라”고 소리쳤던 것처럼 선지자의 목소리를 냈다.

부봉교회 설립은 이현속이 여섯 살 때 일이다. 병마에 시달리던 아버지 이수목이 면 소재지에 있는 산인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가문이 됐다. 이수목은 부봉 집에서 5㎞ 남짓한 산인교회까지 출석하다 땅을 내어 부봉교회를 설립했다. 전답의 3분의 1을 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는 부봉교회가 호주선교사 왕길지(Gelson Engel·1864∼1939)에 의해 설립됐다고 기록했으나 부봉리 주민의 증언과 당시 상황을 종합할 때 이수목이 토지를 헌납해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옛 부봉교회당 내부 모습. 일제 강점기 무렵 강대상 등이 남아있다.

이현속은 열한 살 때 왕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열다섯 나이에 홍선이와 결혼했다. 왕 선교사는 부산·경남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양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21년 이현속은 부봉교회 영수가 됐다. 그 시절 순회 목회를 해야 했던 목사 대신 지역 교회에서 말씀 봉사와 치리하는 이가 영수였다. 그는 시골교회를 지키는 젊은 영수였다. 주일에는 소(牛)도 쉬게 할 만큼 율법에 충실했다. 농번기임에도 예배를 위해 일을 하지 않는 그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했다. 이렇게 반듯한 젊은 영수는 4년 후 장로가 됐다. 그리고 좀 더 체계적인 성경 공부를 위해 진주 경남성경학원 1년 과정의 별과에 입학, 사역자의 길을 택한다.

이현속 장로가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거부 투쟁을 벌이다 잡혀간 진주 배돈병원. 병원 원목 겸 전도사로 헌신했었다.

1906년 지은 예배당 어렵게 현존
현 부봉교회에서 산 아래쪽으로 600m 지점 어연마을에 옛 부봉교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건 뜻밖이었다. 이 예배당은 1990년대 초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정면 두 칸, 측면 네 칸 일자 예배당이었다.

“여기 지붕 아래 서까래 보이시죠. 교회 초기에는 전통 한옥에 초가지붕이었어요. 전통 한옥과 다른 것은 내부입니다. 처음부터 교회 건물로 지었기 때문에 대청 등을 두지 않고 네 칸 바닥을 마루로 깔았어요. 함안과 마산에서 좋은 목재를 구했으며 진주에서 최고의 목수를 불러 지었죠. 당시로선 노아의 방주 못잖은 큰 공사였습니다. 한국교회 초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귀한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찌 허물 수 있겠어요.”

이충길 장로가 증조부와 조부 그리고 아버지(이은성·1960년 작고)가 기도로 지켰던 예배당을 돌며 설명했다. 이러한 신앙의 뿌리는 아들 이규섭(46·경남 창원 새순교회) 부목사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할아버지의 신앙생활이 깊어지면서 많은 동네 사람과 인근 마을 주민이 복음을 받아들였어요. 심방 아니면 전도로 사셨죠. 요즘 분들에게 이런 말 하면 이해하실지 모르겠으나 예수 복음을 받아들인 마을 사람마다 부자가 됐어요.”

경남성경학원을 마친 이현속은 부봉을 떠나 경남 창녕 영산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는 이 무렵 동향 출신 순교자 손양원(1902~1950) 목사를 만난다. 신학교와 영산교회에서 동역한 것으로 보인다. 본과의 손양원은 별과 학생 이현속에게 설교하게 하는 등 사역자로서의 길을 열어줬다. 손양원이 1928년 거제 호곡리교회, 부산 감만동 상애원교회 설교를 그에게 맡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현속은 영산교회를 시작으로 진주 문산교회, 하동 하동읍교회·악양교회, 산청 덕산교회 등을 돌며 단독 또는 순회 목회를 했다. 1934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군국주의 야망이 거세지면서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받기 시작했다. 1937년 산청 생초교회를 개척한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우상의 전에 참배하는 행위는 범죄행위이며 이런 영적 범죄행위에 따를 수 없다”며 저항했다. 핍박을 피해 설교노트마저 불살라야 했다. 그는 감금과 구속, 일경의 관할지역 추방 등으로 고난받다 고향 부봉으로 돌아왔으나 여기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교인들에게 “일본은 곧 패망하게 될 것이니 우상에 절하지 말고 인내하라”고 권면했다.

“일본 곧 패망, 우상에 절하지 마라”
어느 날 부봉교회 교인 20여명이 주재소로 끌려갔다. “신사 앞에 절을 하겠는가, 않겠는가” 물었다. 모두 버티다 도장을 찍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만 두 사람, 이현속과 아버지 이수목은 믿음의 의지를 지켰다. 부자가 순사로부터 뺨을 맞고 발길에 채였다.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차남 성호는 소학교 교정에 세우려던 신사 건립 기부금 십전을 아버지 뜻에 따라 끝까지 내지 않아 퇴학당했다.


1939년 4월. 호주선교부의 도움으로 이현속은 진주 배돈병원 서기 겸 전도사로 시무하며 탄압을 피했다. 그럼에도 이듬해 3월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과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검거령이 떨어졌고 8월 19일 옥에 갇혔다.

이현속 장로(앞줄 왼쪽 두 번째)는 진주 경남성경학원을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동기생들과 함께한 사진.

1941년 이현속은 경남 지방 신사참배 거부자들과 함께 평양형무소로 압송됐다. 최상림 목사, 조수옥 전도사 등이 평양행 동지들이었다. 1943년 7월 옥바라지하던 부인 홍선이 성도가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1945년 4월 이현속은 영양실조 등이 겹쳐 쓰러졌다.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 주기철 목사 부인 오정모 사모가 병보석으로 일시 출감한 그에게 국수를 대접했다. “이제 살 것 같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몸이 회복되자 고등계 형사들은 그를 재수감했다. 그러나 ‘단구의 거인’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월 23일 아내를 따라 하늘나라로 향했다. 김차숙 사모가 고향에 소식을 전했다. 이현속은 평양 돌박산기독교공원묘지에 안장됐다. 한 달 후 장남 은성과 함안읍교회 나영수가 올라와 비석을 세웠다.

‘이현속 전도사님은 장로님으로서 순교하신 경남의 대표적 순교자이시다. 함안 부봉교회 봉헌.’ 비석의 글귀였다. 

■뼛속에 축적된 신앙, 6대째 이어지는 이수목家

옛 부봉교회당에서 600m 떨어진 새 예배당. 이현속 장로의 손자 이충길 은퇴장로와 노명점 권사 부부가 교회 앞 개울가에서 감을 따다 포즈를 취했다.


순교자 이현속 장로의 아버지 이수목은 초기 기독교인이 어떻게 복음을 접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삼형제 중 차남이었던 그는 40세 무렵 과도한 술과 담배로 간이 극도로 나빠졌다. 어느 날 그의 형이 “예수를 믿으면 불치병이 낫는다더라”며 믿음을 가질 것을 권했다. 형은 마산에서 사도신경 쪽복음을 구해줬다.
이수목은 무조건 사도신경을 외웠다. 사도신경을 외우자 마음이 평안해지고 밤마다 괴롭히던 귀신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는 술과 담배를 끊고 건강을 회복한 후 부인과 산인교회에 출석했다. 그 후 아무리 추워도 새벽에 찬물로 목욕하고 엎드려 기도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이현속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신앙을 다졌다. 그렇게 뼛속에 축적된 신앙의 자세가 6대째 이어지고 있다. 부봉교회 출입구엔 ‘순교자기념교회’라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팻말이 걸려 있다.

함안·산청=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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