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내렴의 성화 묵상] 사랑, 타인과 나를 구하는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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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내렴의 성화 묵상] 사랑, 타인과 나를 구하는 실천

입력 2017-12-2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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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식일까, 마음일까, 행위일까. 셋 모두의 결합이다. 도덕적 인식·감정·실천이 합쳐질 때 사랑의 결정체가 나타난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1890년 작)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캔버스에 유화, 73x60cm, 네덜란드 오텔로 마을,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빛나는 사랑의 예가 누가복음서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다(눅 10:25~37). 율법교사는 지식경쟁에서 자신을 돋보이려 예수를 시험하나, 예수는 그의 질문을 지식의 문제로 이끌지 않고 공감과 실천의 문제로 전환한다.

율법교사가 알고 있는 답, 곧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가훈 삼아 멋진 액자에 건다 한들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저 치장에 머물 뿐. 그래서 예수는 말한다. “그대로 행하여라.(눅10:29)” 이때 율법교사가 다시 제기한 “내 이웃”이 누군가란 물음은 이웃의 사회적 금긋기는 어디까지인가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유대인들이 상종하기 싫어한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비유를 든다. 어떤 이가 여행 중 강도를 만나 강탈과 폭행을 당하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를 지나쳤지만, 유대인들에게서 개처럼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만 피해자를 지나치지 않았다.

여기서 배우는 것은 누군지 따지지 않고 ‘피해 상황 그대로 보기’, ‘측은지심으로 공감하기’, ‘더 가까이 다가가 구체적으로 도움을 실행하기’다.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예수의 물음에 율법교사는 그저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한다. 그도 알기는 알고 있다. 예수의 결론은 시작과 동일하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눅 10:37).”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던(롬 12:15)” 사랑의 실천자 고흐의 이 그림을 보자. 사마리아인은 힘껏 피해자를 나귀에 태우고 있다. 그를 안아 올린 상반신은 뒤로 젖혔고, 뒤꿈치를 들며 발끝으로 땅을 지탱한 오른발은 압력을 느끼게 할 정도다. 화면 왼쪽 아래엔 털린 상자가 있고, 그 뒤엔 레위인이 방금 지나간 듯 작게 묘사됐으며, 왼쪽 위엔 앞서 지나친 제사장이 존재감 없이 아주 작게 처리돼 있다. 헌데, 이 그림의 구도와 형상은 고흐 자신의 것이 아니다. 낭만주의의 거장 들라크루아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단지 두 화가의 작품 배치가 좌우로 바뀌고 색채도 바뀌었다.

들라크루아의 사마리아인은 빨강 옷을 입고 전체적으로 명암이 뚜렷하나, 고흐의 작품은 노랑 계열이 주조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밝게 처리돼 있다. 그에게 노랑은 빛과 희망과 구원의 색이며, 파랑은 평화를 상징한다. 그런데 왜 우린 들라크루아가 아닌 고흐의 그림으로 더 얘기하게 되는 걸까. 문학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관객에게 상황을 극대화해 전달하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에 매료된 고흐가 그를 모사하면서도, 자신만의 붓질과 색감으로 감정을 담아 우리에게 또 다른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흐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고 싶어 했다. 들라크루아가 표현한 사마리아인을 닮고 싶었던 것이다.

금빛내렴 <미학자>

누구든 강도를 만나고, 침몰하는 배에, 뜨거운 화염 속에 처할 수 있다. 언제든 내가 그일 수 있다. 역지사지, 동병상련. 공감하기의 다른 표현들이다. 대접받고 싶은가, “남을 대접하여라.(마 7:12)” 살고 싶은가, 남을 살려라. 사랑은 “말과 혀로”하는 것이 아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게 진짜 사랑이다(요일 3:18).

그간 함께 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복되고 사랑 가득한 새해 이루시길 빕니다!

금빛내렴 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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