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 기자의 안녕? 나사로] 생을 향한 ‘채비’

국민일보

[최기영 기자의 안녕? 나사로] 생을 향한 ‘채비’

두 달 전 개봉한 영화 ‘채비’가 보여주는 엄마와 아들의 일상이다.

입력 2018-01-1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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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인규씨는 오늘도 엄마한테 맞는다. 치약 대신 샴푸로 이를 닦다 거품을 문 채 맞고 머리를 감을 때 움직이다가, 옷을 안 입겠다고 도망치다, 한글 공부를 안 하겠다고 버티다 맞는다. “똥 멍청이야. 너 땀시 힘들어 뒤지겄다”며 한숨을 내쉬는 엄마 애순씨를 향해 아들은 우스꽝스런 율동과 함께 트로트 ‘무조건’을 불러준다. 쉴 새 없이 채근하는 아들을 달래고 혼내는 것으로 24시간을 채우는 애순씨의 고단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다. 엄마에겐 아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특급 사랑’이다.

두 달 전 개봉한 영화 ‘채비’가 보여주는 엄마와 아들의 일상이다. 영화는 발달장애인 아들의 홀로서기를 위해 세상에 하나뿐인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이를 채워나가는 엄마의 고군분투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국민 엄마’ 배우 고두심(애순 역)과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며 ‘천의 얼굴’로 불리는 배우 김성균(인규 역)이 극을 이끈다.

아직 부모의 둥지 안에 있는 자식 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지 않길 바라는 것. 장애를 가진 자녀와 살아가는 부모의 공통적인 소망이다. 극중 애순씨가 운영하는 작은 노점상은 모자의 보금자리이자 삶의 둥지다. 이곳에 자주 들러 복음을 전하는 한 목회자와 애순씨가 나누는 대화엔 그 소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규 어머니. 힘들 때 일수록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교회 한 번 오시지요.”
“주님, 그렇게 맘씨 좋은 양반이면 애초에 나한테 이 고생을 시켰겄소? 그리 능력 있는 양반이라면 나랑 우리 아들 한 날 한 시에 뒤지게 해달라고 쇼부(흥정)나 좀 쳐주시오. 나가 소원은 그것밖에 없응께.”

잔소리꾼 엄마와 사고뭉치 아들의 행복하면서도 전쟁 같은 일상은 애순씨가 쓰러지면서 일대 위기를 맞는다. 뇌종양 말기. 길어야 1년, 짧으면 6개월이란 의사의 진단과 함께 엄마의 ‘채비’가 시작된다. 헤어짐을 준비하는 엄마의 목표는 두 가지다. 아들의 사회적 자립과 헤어짐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 30년 동안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아기 새의 둥지 밖 모험을 위해 어미 새는 남아있는 생이 줄어드는 걸 감수한 채 끝 모를 희생을 반복한다.

취재 현장에서 마주하는 장애인 가족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뇌병변 장애인 아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 들어 옮기느라 어느 관절 하나 성한 곳 없지만 파스 한 장과 아들의 웃음에 건강을 맡겨두는 엄마, 밤새 수도 없이 발작을 일으키는 딸을 보호하느라 자기 몸이 피멍으로 물드는 건 잊고 사는 엄마. 그들의 삶은 분명 고달프다. 주변에선 그들이 겪는 불편을 불행으로 치부하며 가슴에 못을 박기도 한다. 하지만 편견, 차별, 왜곡된 시선 등의 아픔을 딛고 가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야. 엄마 아들(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넌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이란다.”
모정(母情)은 문자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희생이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사랑이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바라보는 절대자의 시선과 같다. 생의 끝자락에서 애순씨는 아들에게 나지막이 말한다.

“인규야. 엄니는 니 덕분에 한 평생 행복했어. 매일매일 재밌었어.”

인규씨는 ‘하늘나라 갈 때 씩씩하게 웃으면서 손 흔들어달라’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킨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그곳엔 목사님이 “미국 중국 영국은 지도에 있지만 이 나라는 지도에 없다. 저 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 준 ‘천국’이 있다. 둥지를 떠난 아기 새가 세상으로 날갯짓 할 채비를 마친 듯 했다.

최기영 기자

반려인 연구소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