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자/양치기 소년이 된 ‘광주형 일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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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기자/양치기 소년이 된 ‘광주형 일자리’.

입력 2018-12-06 16:21 수정 2018-12-07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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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노사민정협의회와 현대차의 엇박자로 ‘광주형 일자리’가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6일 오전 광주시청사 1층.

‘광주시와 현대차의 투자협약 조인식’을 위해 설치된 화려한 조명과 무대장치, 의자들이 을씨년스런 초겨울 날씨 속에서 하나둘씩 소형 트럭에 실려 철거되고 있었다.

겨울비가 새벽부터 촉촉하게 대지를 적신 탓일까. 조용히 치워지는 각종 집기들에도 빗물이 몇 방울씩 튀어 폐기물처럼 초라해보였다.

현대차가 ‘광주형 일자리’에 대한 노사민정협의회의 수정 합의안에 단호한 거부의사를 표명하면서 당초 이날 오후 2시로 예정됐던 조인식은 단숨에 없던 일이 됐다.

시청사 1층 로비에 임시 설치된 무대에서는 전날 저녁까지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하는 ‘VIP 행사’를 완벽하게 치르기 위한 리허설이 수차례 진행됐지만 허사에 그쳤다. 조인식은 ‘행복한 동행’을 주제로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막상 행사장은 쌩생 찬바람만 불었다.

9부 능선을 넘은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광주형 일자리도 하룻밤 사이에 허공중의 메아리처럼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노사상생을 위한 ‘광주형 일자리’가 이날 투자협약 조인식 직전 다시 급제동이 걸린 것이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광주시민들은 협상에 임하는 광주시와 현대차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광주형 일자리 합작법인의 1,2대 주주인 광주시와 현대차의 상호간 신뢰도는 오히려 금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와 현대차는 지난 6월부터 6개월 동안 20여 차례의 마라톤협상에서 머리를 맞댔으나 옥동자를 순산하지 못하고 있다. 갈수록 ‘네 탓’ 공방 수위만 높이는 형국이다.

투자협약 조인식에 참석하려던 문재인 대통령의 광주 방문 일정도 그동안 두 번씩이나 취소돼 광주가 자칫 ‘동화 속 양치기 소년’으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현대차는 5일 밤 광주시노사민정협의회가 수정 의결한 최종 합의안에 대해 단박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최대 쟁점인 단체협약 유예 조항을 삭제하거나 수정할 경우 사업 타당성이 없다며 노동계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광주시가 수없이 입장을 번복했다고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광주시가 노동계 반대에 못 이겨 약속을 깼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투자협약 조인식 일정도 동의한 바 없다고 밝혔다.

현대차는 노동계가 독소조항이라고 반대해 광주시노사민정협의회가 우여곡절 끝에 수정 의결한 3가지 방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누적 35만대 자동차를 생산할 때까지 임단협을 유예하는 조항을 반드시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맞선 광주시는 글로벌기업인 현대차가 지나치게 ‘우월적 지위’를 고집해 협상의 판을 엎었다는 입장이다. 반값 임금을 볼모로 한 ‘이윤추구’에만 몰두했다가 발을 빼려는 명분만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병훈 광주시 문화경제부시장은 “투자협정서 수많은 쟁점들을 합의했는데 유일하게 남은 상생협의회 결정사항 유효기간 문제로 협상타결이 무산된 것은 안타깝다”며 “그 하나의 쟁점이 합의되지 않아 청년들의 일자리와 국민들의 염원을 이루지 못해 가슴 아프다”고 밝혔다.

현행 노동 관련법을 어겨도 무방하다는 현대차의 협상태도도 문제로 지적된다. 현행법에 의무화된 임금·단체협상을 5년간 유예하자는 발상은 건전한 노사관계를 좀 먹는 초헌법적 발상이라는 분석이다.

근로자 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근참법) 12조에는 노사협의회를 3개월마다 개최토록 명시돼 있다. 근로기준법 등에도 임·단협을 1년~2년 단위로 하도록 규정돼 있다.

신설 합작법인의 노사관계가 상생협의회(노사협의회)체제로 가면 근참법, 정식 노조가 설립되면 노동법의 적용을 받는다.

어떤 법으로나 5년간 임·단협 유예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광주시는 법무법인의 자문을 구해가며 합의안 문구를 신중히 손질하는 등 투자협정서를 다듬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광주형 일자리가 본의 아니게 한 해 두 번씩이나 국가원수의 방문을 주저앉혔다는 자조적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광주형 일자리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19일에 이어 6일에도 투자협약 조인식 참석을 위해 광주를 찾기로 했다가 막판 협상이 틀어지는 바람에 잇따라 일정을 취소하는 촌극을 벌였다.

광주시 역시 1층 로비에서 성대한 행사를 열고 4년여만의 성과를 자축한다는 기대에 들떴다가 현대차의 양보를 이끌어내지 못하면서 첫 단추부터 다시 꿰야하게 되자 허탈한 모습이다.

경호와 의전 업무를 위해 ‘갑호비상령’을 내렸던 경찰 등도 두 번이나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고 볼멘소리다.

광주시는 냉각기를 가진 뒤 12월 중 최종 타결을 목표로 협상을 재개할 방침이지만 합의안을 도출 이후 깨진 협상 결렬에 따른 후유증이 만만치 않아 결과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타결 직전 마지막 고비를 연거푸 넘지 못한 광주형 일자리는 진흙이 가득한 험로에서 벗어날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이다.

현대차와 노동계는 출범하지도 않은 신설 합작법인의 노사 임·단협 유효시한을 결코 양보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이를 두고 광주시 주변에서는 “막후에서 벌여온 현대차와 협상과정을 공개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광주는 정치권을 등에 업은 ‘벼랑 끝 전술’에 몰두하고 현대차는 판을 뒤엎을 명분 찾기에만 골몰해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대차가 투자하는 완성차 공장이 문을 열면 우리 두 아들 녀석들에게 꼭 원서를 내보라고 할 참이었는데...”

민원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광주시청사를 찾았다가 발길을 돌리던 한 50대 남자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 속에 대다수 광주시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녹아 있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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