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만한 세상] “텍사스의 한 할아버지로부터...” 전직 대통령의 편지

국민일보

[아직 살만한 세상] “텍사스의 한 할아버지로부터...” 전직 대통령의 편지

세상 뜬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 필리핀 아동 10년 넘게 비밀리에 후원

입력 2018-12-19 15:29 수정 2018-12-19 15:59
  • 국민일보 카카오플러스 친구등록하기

고(故)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10년간 필리핀 아이를 비밀리에 후원해왔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난달 30일 향년 94세를 일기로 작고한 부시 전 대통령이 가명을 써가면서까지 필리핀에 사는 7살짜리 남자아이를 10년 넘게 후원해왔다고 CNN이 18일(현지시간) 보도했습니다.

부시와 이 남자아이의 첫 만남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부시는 비영리 아동 후원 단체인 컴패션재단을 통해 티모시란 이름의 이 아이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로부터 10년간 부시는 티모시의 학업과 끼니를 책임졌으며 대외활동을 위한 후원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와 함께 부시가 생전 티모시에게 썼던 편지의 일부도 공개됐습니다.

고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후원했던 티모시군(컴패션인터내셔널)

부시는 후원을 시작하자마자 직접 자필로 그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1월 24일 보낸 첫 편지에서 부시는 “난 텍사스에 사는 77살의 나이 많은 할아버지란다. 난 아이들을 아낀단다. 비록 우리가 직접 만나진 않았지만 이미 난 너를 사랑한단다. 너와 펜팔(편지를 주고받는 친구)이 되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부시가 티모시를 후원하게 된 계기는 웨스 스태포드 전 컴패션재단 총재로부터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시가 처음으로 아동 후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1년 즈음 워싱턴에서 열린 한 크리스마스 콘서트에 참석하면서부터였습니다. 당시 연주자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었고 컴패션재단이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콘서트 중간 청중들을 향해 아동 후원을 독려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경호를 받으며 앉아있던 부시가 손을 들어 안내 책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주변에선 그를 만류했지만 그는 아동 후원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부시의 참모가 “만약 전 대통령께서 아이를 후원하시겠다고 하시면 절대 그 아이가 이를 알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스태포드 총재에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지에 ‘조지 워커’라는 그의 이름의 일부를 딴 필명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또 부시의 경호팀은 티모시의 안전에도 만전을 기했다고 합니다. 만약 누군가 티모시가 전직 미국 대통령과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신변에 위협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쓴 후원편지(컴패션인터내셔널)

하지만 부시는 은근슬쩍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힌트들을 편지 속에서 언급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기르고 있던 강아지 사진을 보내줬습니다. 부시는 편지에서 “이 친구의 이름은 새디란다. 암컷인 새디는 아주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 잉글랜드에서 태어났고 아주 순하단다. 아주 바람처럼 재빠르게 뛰어다니기도 하지”라며 자신이 아끼던 강아지를 소개해주기도 했습니다. 유명인의 애완견도 그만큼 유명세를 타기 때문에 눈치가 빠른 어른들에게 들킬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백악관이 어딘지 아느냐”면서 “미국 대통령이 사는 곳인데 지난 크리스마스 때 백악관에 다녀왔다”면서 작은 책자를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티모시군이 당시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 온 감사편지(컴패션인터내셔널)

원래 후원 아동에게 직접적으로 선물을 주는 건 허용되지 않았지만 부시는 티모시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티모시의 교회를 통해 색연필과 스케치북 등을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이에 티모시도 답장을 전해왔습니다. 그는 “잘 지내시죠.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저를 잊지 않고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세요. 우리에게 어디든 갈 수 있는 건강한 신체와 의지를 주셨으니까요. 보내주신 책 너무나 감사드려요. 정말 마음에 듭니다”고 적었다고 합니다.

티모시군이 당시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 온 감사편지(컴패션인터내셔널)

다행스럽게도 티모시는 후원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부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17살이 되어 학교를 졸업하던 해 담당자를 통해 후원자의 정체를 알게 됐을 때 티모시는 무척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후로 티모시의 삶도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전해졌습니다. 이 소식을 마지막으로 티모시의 소식을 더 이상 접할 수 없었지만 “분명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스태포드 총재는 말했습니다. 그는 또 “아이를 후원한다는 것은 그들이 절망에 빠져 있더라도 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이끌어주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놀라운 일이다”고 말했습니다.

컴패션재단은 지금도 25개 나라에서 7000여개의 교회와 연합해 도움이 필요한 가정을 후원하고 가난한 이들을 격려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임보혁기자 bossem@kmib.co.kr

많이 본 기사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