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민의 위로] 고독 속에 임한 위로

국민일보

[강준민의 위로] 고독 속에 임한 위로

입력 2019-02-11 11:11 수정 2019-02-1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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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慰勞)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데는 일평생이 걸린다. 사랑이라는 단어처럼 위로라는 단어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위로라는 단어는 인지적인 언어가 아니라 감성 언어다. 인지적인 언어가 머리를 움직이는 것이라면 감성 언어는 마음을 움직인다. 위로는 감성 언어다. 공감 언어다. 위로란 단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누구나 알고 느끼는 단어다.

인간은 결핍된 존재다. 자존할 수 없다. 사람은 외부로부터 공급이 필요하다. 몸을 위해서는 음식과 물과 산소의 공급을 받아야 한다. 정서를 위해서는 사랑과 위로와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면 정서적인 결핍증을 앓게 된다. 사랑의 접촉이 없이는 살아가는 것은 고통 그 자체다. 영혼을 위해서는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눠야 한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때 영혼은 기쁨으로 충만케 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위로다.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참으로 힘든 일이다. 누가 산다는 것이 쉽다고 했는가?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 것이다.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다. 고통을 온 몸으로 껴안는 것이다. 나는 가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살아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의 첫 번째 의무는 살아내는 것이다. 생을 포기하지 않고 모든 어려움 중에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힘찬 박수를 보내야 한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고난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가끔 우리를 찾아온다. 풀어야 할 문제가 많고,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많다. 산 넘어 산이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온다. 모세의 고백처럼 인생이란 수고와 슬픔의 연속이다. 너무 인생을 비관적으로 묘사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인생을 조금만 살아 보아도 인생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어린 아이들을 만나보라. 그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가끔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을 향해 “너희는 참 좋은 때 태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하지만 좋은 때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가는 때를 가장 힘들게 여기며 살아간다. 모순 같지만 사실이다.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외로움이다. 우리는 외롭다.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외롭다. 우리 모두는 외롭다. 외롭지 않기 위해 결혼했다가 더욱 외로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외롭지 않기 위해 친구를 사귀었다가 배신의 쓴 잔을 마시고 나면 더욱 외로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외로움이란 혼자라는 느낌이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버림 받은 느낌이다. 외로움이란 나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서 온다. 외로움은 인간의 실존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롭게 살아가며, 외롭게 죽어간다. 고령화시대에 어른들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이 외로움이다. 그래서 요즈음 등장한 언어가 “고독사(孤獨死)”다. 주변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쓸쓸하게 죽는 것을 의미한다.

외로움은 위로의 결핍이다. 위로란 누군가가 찾아와서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다.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다. 때로는 그냥 우리 곁에 말없이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그냥 우리의 아픔을 공감해 주는 것이다. 얼마나 외롭냐고, 얼마나 힘드냐고, 얼마나 고통스럽냐고, 얼마나 아프냐고 축 처진 어깨를 감싸주는 것이다. 외로움은 위로에 대한 그리움을 낳는다. 외로움은 위로자를 갈망케 만든다.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사는 것이 힘들어서 힘든 것이 아니라 위로가 없어서 힘이 든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로해 준다면 힘든 인생도 살아갈 만하다. 버틸 만하다. 남편은 아내와 자녀들에게 위로를 받고 싶다. 남편은 아내와 자녀들이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아주길 바란다. 위로는 알아줌이다. 위로는 이해해 주는 것이다. 오해가 아닌 이해가 바로 위로다. 아내도 남편에게 위로를 받고 싶다. 집안 일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많은지를 남편이 알아주길 원한다.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아내는 직장에 나가 있는 동안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남편이 알아주기를 갈망한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자녀들은 학교에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공부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부모가 알아주기를 갈망한다.

우리 주위에는 혼자서 자녀를 키우는 싱글 맘들이 상당히 많다. 직장에 나가 돈을 벌면서 혼자서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마음을 이해해 주고 자녀들이 엄마의 마음을 위로의 말로 어루만져 준다면 힘든 것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위로에는 한계가 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러 왔다가 욥에게 엄청난 상처와 아픔을 주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사람이 베풀어 주는 위로의 한계다. 영적 민감성을 가진 위로자를 만나는 것이 어렵다. 우리도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러 갔다가 상처를 주고 온 경험들이 있다. 경박한 위로는 사람들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 싸구려 희망은 우리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

헨리 나우웬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성 생활이라고 말한다. 그는 “외로움의 광야에 들어가서 조용히 끈기 있는 노력을 통해 그 광야를 고독의 동산으로 바꾸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헨리 나우웬, 『영적 발돋움』, 두란노, 34쪽). 외로움이 그냥 홀로 있음이라면 고독이란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외로움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깊은 고독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다.

깊은 고독은 은총의 사건이다. 깊은 고독을 통해 위로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고후 1:3). 참된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위로의 샘이다. 고독이라는 두레박으로 위로의 샘에서 위로의 물을 길어 마시도록 하라. 하나님은 외로움의 고통을 아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그런 까닭에 우리 인간의 실존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도 외로우시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라. 예수님은 외로우셨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을 만큼 외로우셨다. 그래서 외로운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외로움이 외로움을 치료하듯 외로우셨던 예수님이 외로운 우리를 치유해 주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실 때 외로우셨다. 예수님의 고통은 전 인류의 고통을 껴안으신 까닭에 그 고통은 잔인할 만큼 격한 고통이었다. 예수님은 전 인류의 외로움을 껴안으신 까닭에 그 외로움은 격한 외로움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외로움 속에 부활이 임했다. 십자가의 고통과 외로움이 없었다면 부활은 없다. 예수님의 부활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성령님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위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외로움이 고통스럽지만 외로움 때문에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깊은 고독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외로움은 변장된 축복이다. 우리의 외로움을 하나님 앞에 서는 고독으로 승화시키도록 하자. 우리의 외로움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도의 문이 되게 하자. 깊은 고독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위로로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자. 이 세상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위로다. 인간적인 위로가 아닌 하나님의 위로로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는 참된 위로자가 되도록 하자.

강준민(L.A. 새생명비전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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