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톡] “목사가 정치를?…선비목사 이원영 총회장을 보라”

국민일보

[미션톡] “목사가 정치를?…선비목사 이원영 총회장을 보라”

입력 2019-06-2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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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목사. 국민일보DB

극우 정치에 교회 연합기구를 끌어들인 목사를 두고 말들이 많습니다. 정당 정치에, 그것도 가장 오른쪽 방향으로 교회 다수를 엮으려는 시도를 보면서 한국교회 원로들마저 ‘염려와 통회’를 금치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과거 한국 정치사에서 목사와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가 빈번했음을 부인하긴 어렵습니다. 이승만 장로 대통령, 함태영 목사 부통령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승만 독재의 마지막 러닝메이트였던 이기붕도 권사 출신입니다.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전국 수련회에선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회사 전공 교수가 나와 목사의 공인(公人)됨을 성찰했습니다. 임 교수는 앞서 언급한 이들과 정반대의 길을 걸은 한 목회자를 소개했습니다. 퇴계 이황의 14대 후손으로 경북 안동에서 목회한 이원영(1886~1958) 목사가 주인공입니다.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가 27일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전국 수련회에서 공인으로서 목사에 관해 발제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이 목사는 1919년 3·1운동 당시엔 선비였습니다. 유림의 일원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옥에 갇힙니다. 거기서 안동교회 조사였던 이상동을 만나 신앙을 접합니다. 이후 평양신학교를 나와 목사안수를 받고 경북 안동의 안기교회(현재 서부교회)에서 목회합니다.

이 목사가 후대에 주목받은 건 38년 안기교회에서 쫓겨나면서부터입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교회서 쫓겨나고 교단에서 출교 처분까지 받았습니다. 십계명 중 제1계명인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 섬기지 않기 위함인데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뿐만 아니고 조선교육령과 창씨개명까지 삼위일체로 거부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 목사는 가족과 산골짜기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6년여를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족 구성원과 매일 예배보는 일을 놓지 않습니다. 그는 “목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 선포를 중단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와 성도를 다 빼앗기고 가족만 앞에 두고서라도 설교하는 일을 계속한 것입니다. 임 교수는 “바로 이 점이 목사의 공인 의식”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당시 장로교단은 38년 총회 결의를 통해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습니다. 예배에 앞서 궁성요배와 황국신민서사를 먼저 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난 뒤 찬송가를 부르던 뼈아픈 역사입니다. 42년엔 일제 해군에 ‘조선 장로호’ 전투기까지 헌납했습니다. 교회 종과 놋그릇을 가져다 바쳤습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란 명분 때문이었습니다.

이 목사는 8·15 광복을 맞이할 즈음, 정치가로 나설 기회를 맞이합니다. 45년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가 경북 안동지역 위원장직을 제안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목사는 그 자리에서 거부하며, “신사참배로 무너진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건준의 제안 뿌리친 뒤에는 지역교회를 순회하며 하얀 두루마기 한복 차림으로 강단에서 성경을 강해하고 무너진 교회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목사는 54년 장로교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추대됐습니다. 당시는 투표로 총회장을 뽑는 게 아니고 추대였습니다. 총회장으로서 그는 38년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는 성명 발표합니다. 앞서 신사참배를 강행한 교단 지도부를 공격하지 않고 이 문제로 분열된 장로교의 화합에 끝까지 힘썼습니다. 목회자의 정치력은 바로 이런 분야에서 발휘되어야 합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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