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사]“큰 손 여러 명 걸렸다” 범죄사업된 스테로이드 불법유통

국민일보

[이슈&탐사]“큰 손 여러 명 걸렸다” 범죄사업된 스테로이드 불법유통

일반인에도 확산, 판매리스트 10건에만 1만926건

입력 2019-07-18 04:00 수정 2019-07-18 04:00

“‘큰 손’ 여러 명이 걸렸다.”

전직 프로야구 선수 이여상이 유소년들에게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불법 투약해 구속됐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스테로이드 관련업계에서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취재결과 실제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큰 손’으로 통하는 스테로이드 불법 유통업자 여러 명을 입건해 수사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전국적 조직망을 갖추고 국내 유통되는 불법 스테로이드 상당수를 직접 공급해온 상선책으로 알려졌다. 태국, 캄보디아, 중국 등에서 약품을 사들이거나 원재료를 구입한 뒤 재가공해 보디빌더, 헬스 트레이너 등으로 구성된 국내 중간책에게 판매해 온 인물들이다. 이여상은 중간 유통상 격인 보디빌더로부터 약품을 구입해 ‘돈벌이’에 사용한 일종의 소비자였던 셈이다.

국민일보는 유소년까지 번진 불법 스테로이드 유통경로와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전·현직 불법 유통업자 여러 명을 접촉했다. 이들 역시 대부분 ‘큰 손’의 존재를 인정했다. 과거 일부 보디빌더 선수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유통됐던 스테로이드 판매구조가 점차 확산돼 전문 유통업자가 낀 일종의 범죄 사업 형태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재수 없이 걸리지만 않으면 최소 3~4배 수익을 남긴다. 구매자는 처벌되지 않으니 사겠다는 사람도 많다. 누구라도 혹하지 않겠나?” 수도권에서 헬스장을 운영하는 트레이너 A씨가 설명한 스테로이드 불법 유통 배경이다. 그는 5년 전 스테로이드 제품을 해외에서 불법으로 들여오다 적발돼 처벌받았다. A씨 증언에는 부작용이 널리 알려졌음에도 스테로이드 불법 매매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집약돼 있다. 약물의 힘을 빌려서라도 신체적 한계를 넘고 싶다는 욕망과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유통방식이 성인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성장기가 채 끝나지 않은 유소년 선수에게까지 유혹의 손길을 뻗치게 됐다는 것이다.

구매 열풍은 최근 일반인들에까지 확산했다. 국민일보는 익명을 전제로 취재에 응한 5명의 증언과 최근 10년간 수사 자료 및 판결문 내용을 토대로 스테로이드 불법판매 온상을 파악해 봤다. A씨 설명처럼 스테로이드 불법 유통은 한국에서 ‘돈 되는 사업’이 돼 있었다.

A씨는 “10여년 전만 해도 해외에서 싸게 구한 스테로이드를 국내에 들여와 팔면 10배 가까이 이윤을 챙겼다. 최근 들어서는 이 바닥도 경쟁이 심해져 수익이 좀 줄긴 했지만 들여오기만 하면 여전히 1만원짜리를 4만~5만원에 팔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그가 동료들과 들여오려다 적발된 스테로이드 양은 약 20만병, 국내 시가로 1억3000만원이 넘는 액수였다. 그는 “다들 요리조리 안 걸리고 잘 들여오는데, 솔직히 말하면 재수가 없는 케이스(사례)였다”고 했다. 지난 10일 부산의 한 헬스장에서 만난 보디빌더 B씨도 “외국에 가서 몰래 사오면 가격을 4~5배 정도 비싸게 되팔 수 있기 때문에 돈이 엄청 남았다”며 “다만 요새는 과거보다는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B씨는 “종목을 불문하고 운동선수라면 누구라도 더 강해지고 싶은 욕심에 스테로이드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특히 보디빌더들은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약물의 힘을 빌려야 할 시점이 반드시 오게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밀수업자로부터 약물을 받아 당시 그런 동료나 후배 선수들에게 되팔았다. B씨는 “주로 어린 선수들이 아직 스테로이드를 어디서 구입하는지, 어떻게 복용해야 하는지 모르다 보니 주변 유명한 선수들에게 몰래몰래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고, 선배들이 아는 업자를 통해 약물을 구해다 주는 식이었다”고 했다.

2015년 2월 인천공항에서 발생한 납치사건은 이 같은 유통구조의 단면을 보여줬다. 당시 주식회사를 운영하던 임모씨는 태국으로 출국하려는 부하직원을 납치한 뒤 지인이 운영하는 룸살롱에 감금해 폭행, 돈을 갈취했다. 수사결과 임씨는 태국에서 스테로이드 제품을 대규모 밀수해 국내에 유통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임씨는 자금관리, 해외구입, 국내 밀반입, 국내유통 등 역할을 각각 구분해 조직적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부하직원은 판매대금 일부를 훔쳐 달아나다 임씨에게 걸렸다. 수사 과정에서 주문리스트 등 문건이 발견됐는데 여기에는 전국 헬스장 주소와 연락처가 적힌 문건이 포함됐다.

업계 관계자들은 보디빌더나 헬스트레이너들이 관련 약품을 주로 구매하는데, 이들 중 일부는 국내 유통구조에서 구매대행 같은 중간책 역할까지 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스테로이드 제품을 구매하면서 불법 유통 구조를 파악한 이들이 중간 사업으로 뛰어든다는 것이다. 스테로이드 불법 유통 처벌 전력이 있는 또 다른 헬스 트레이너 C씨는 “전국에 꽤 유명하다는 보디빌더들 계좌를 한 번 다 까서 보라. 그중 안 걸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씨 수사 때 헬스장 주소 문건이 나온 게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국민일보가 확보한 스테로이드 불법 유통 사건 10건의 판매리스트에는 1만926회 구매 내역이 담겼다. 선수들의 중복 구매를 감안해도 일반인 수요자 역시 적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B씨는 “(회사원, 학생 같은) 아마추어들이 오남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운동선수들 중심으로 수요가 꾸준히 늘면서 유통구조가 형성됐고, 이제는 약품 수요가 일반에까지 확산되다 보니 스테로이드를 공급하는 업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나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림= 전진이 기자

다변화된 유통 경로

수요가 많다보니 공급경로도 다양해지고 있다. 스테로이드 제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해외에 근거지를 둔 국내 판매 조직이 이미 형성돼 있는 상태인데다, 이들에게서 약품을 사들여 되파는 중소규모 유통상 역시 최근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스테로이드 제품을 대량 구입한 뒤 국내에서 소단위로 나눠 파는 식으로 장사하고 있었다.
B씨는 “3~4명 단위로 관광객처럼 위장해 나간 뒤 약품을 나눠오는 식도 있고, 10여 년 전부터는 ‘인터넷 직구’를 활용하는 유통업자가 대거 등장했다. 직접 해외 판매 사이트에 접속한 뒤 국제우편으로 제품을 수령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따이공’이라 불리는 보따리상도 활용되는데, 이들은 태국이나 캄보디아에서 중국을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경로를 이용한다고 한다. 인터넷 직구는 일반 밀수처럼 내용물과 다른 제품의 이름을 포장지에 표기하는 방법 등이 쓰인다. A씨는 “걸리지 않게 포장하는 게 그 친구들(해외 판매업체)의 기술”이라며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구입하는 게 어렵지 않다. 특히 요즘 인터넷이나 SNS가 워낙 좋아서 아마추어 선수나 일반인들도 해외 판매책에 직접 접근이 가능해졌다”고 했다.

국내 제약회사에서 합법적으로 제조되는 스테로이드 제품을 빼돌려 불법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B씨는 “스테로이드 약품을 취급하는 제조업체 관계자나 약사에게 웃돈을 얹어주고, 판매처를 허위로 기재하는 방식 등을 쓴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해외에서 직접 재료를 들여와 불법 제조·판매하는 조직이 생겨나고 있다는 데 있다. 자신을 스테로이드 디자이너라고 소개한 D씨는 “직접재료를 들고 와 국내에서 공장도 아닌 가정집 같은 곳에서 스테로이드제를 제조 판매하는 게 심각한 문제”라며 “제품의 질이 확인되지 않은 약품들이 많다. 자격 없는 자가 임의 제조한 검증되지 않은 약물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최근 무허가 스테로이드제 제조공장까지 차린 일당을 적발한 식약처 관계자는 “주사제는 혈관에 직접 넣는 거라 멸균실에서 만들어야 하는데 (제조 방식이 허술해서) 너무 황당했다”고 말했다.

식약처, ‘큰 손’ 계보 수사

식약처 기획 수사는 지난해 12월 박승현씨를 비롯한 일부 보디빌더 출신 BJ들이 ‘유투브TV’를 통해 자신의 스테로이드 복용을 고백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했다. 인터넷 카페나 SNS를 이용한 판매업자들을 우선 조사한 뒤 이들에게 스테로이드를 대량으로 밀수입해 공급한 이른바 ‘큰 손’들을 추적해 나가는 중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우리나라에 몇 개 내로라하는 큰 손들이 있는 걸 확인했다”고 말했다.

식약처는 대규모 밀수입을 하는 ‘큰 손’ 조직에서 시작된 계보 추적 중 스테로이드 디자이너들의 혐의도 발견해 입건했다. 디자이너들은 목적에 따라 복용해야 할 스테로이드의 종류와 양을 주 또는 일 단위로 설계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다. 국민일보 취재과정에서 “스테로이드 복용법을 디자인만 해줬다”고 주장한 D씨 역시 약물을 일부 판매한 혐의로 입건된 것으로 알려졌다. 1세대 디자이너로 D씨의 스승격인 E씨 역시 약사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E씨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스테로이드 관련한 책을 낼 정도로 스테로이드 업계 계보에서 핵심 인물로 꼽힌다. 식약처는 단순 공급·판매 외에 스테로이드 디자인에 대한 책임도 함께 묻는다는 방침이다. 보건당국 관계자는 17일 “디자인이라는 행위가 사실상 불법 의약품을 알선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불법판매에 디자인까지 병행했다면 수법상 죄질이 더 나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식약처는 야구 외 다른 체육계에도 스테로이드가 유입됐는지까지 확인하고 있다. 지난해 부산에서는 이미 격투기 선수, 피트니스 모델에 스테로이드를 공급한 일당이 적발되기도 했다.

정현수 김판 기자 jukebo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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