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대선, ‘노태우 낙선’ 염려로 부정선거 모의한 전두환세력

국민일보

87년 대선, ‘노태우 낙선’ 염려로 부정선거 모의한 전두환세력

SCMP, 제13대 韓대선 직전 CIA 보고서 폭로

입력 2019-07-21 16:26 수정 2019-07-21 16:43

지난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후 처음으로 치러진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이 여권 후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낙선할 것을 염려해 광범위한 부정선거를 계획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0일(현지시간) 제13대 대선 직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작성한 정보보고서를 토대로 당시 신군부를 등에 업은 여권이 대선 참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투표 조작은 물론이고 선거 무효 선언까지 검토하는 등 구체적인 부정선거 계획을 강구했다고 보도했다. 보고서에는 “여당 간부들은 노태우의 당선 가능성을 두고 분열하고 있으며, 선거를 조작해야 할 수도 있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광범위한 조작 계획이 이미 시행되고 있다”는 내용이 기재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사회는 1987년 민주화 혁명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다. 같은 해 12월 16일 치러진 대선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후계자였던 노 전 대통령은 여권 후보로 나왔고, 야권에서는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와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출마해 삼파전을 벌였다. 야권 표가 민주화운동의 양대 거목으로 각각 분열되며 노 전 대통령은 36.6%의 득표율로 당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민정당은 선거에서 졌을 경우 향후 수습책까지 강구하는 등 고민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군부 독재 통치의 협력자라는 노 전 대통령이 가진 부정적 이미지 탓에 통제 불가능한 직선제 선거에서는 대선 패배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민정당은 노 전 대통령이 낙선할 경우 전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선거 무효를 선언하는 방안까지 고려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한 소식통은 CIA 측에 “여권 전략가들이 초기 개표 결과 노 후보가 패배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할 경우 증거를 날조해 전 전 대통령이 선거무효를 선언하는 방안도 검토했다”고 보고했다.

전두환정부는 선거 후 발생할지도 모를 ‘소요 사태’에 대비해 계엄령 선포 등 구체적인 대응 계획도 논의했다고 한다. 대선을 5일 앞두고 작성된 CIA 보고서에는 “정부 고위 관료들은 노 후보의 당선에 대해 광범위한 불만이 표출될 경우 계엄령이나 긴급조치를 발동해 이를 조기에 진압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또다른 보고서에 따르면 전두환정부는 김대중 후보가 선거 결과와 관련해 대중의 저항을 선동할 경우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도 준비했다.

SCMP는 CIA 측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해당 보고서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도 신군부 기반 정부·여당의 반동적 움직임에 대해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제13대 대선 직후 일각에서 선거가 조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다만 야권 분열로 노 전 대통령이 어부지리로 당선됐다는 여론이 힘을 얻으며 이 같은 주장은 금세 가라앉았고, CIA도 이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대선 후 CIA의 정보보고서에는 “노태우 당선에 대한 절제된 여론 반응은 한국 국민들이 대선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내용이 기재됐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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