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값’과 ‘목숨줄’ 사이…“엄마는 11개 직업을 전전하며 나를 키웠다”

국민일보

‘반찬값’과 ‘목숨줄’ 사이…“엄마는 11개 직업을 전전하며 나를 키웠다”

무너지는 가장, 흔들리는 가족경제 ①

입력 2019-08-18 18:31 수정 2019-08-18 18:31

여성 생계 부양자 ‘일자리’ 부업 수준 많아
평생 11개 직장 전전해도 ‘최저임금 수준’
노후 준비 미흡으로 60대 되서도 ‘은퇴’ 못해

여성 생계부양자의 삶은 ‘반찬값’과 ‘목숨줄(생업)’을 오간다. 남편의 적은 소득을 보전하려는 ‘부업’과 홀로 가족경제를 책임지는 ‘생계’ 사이에 놓여 있다. 그런데 중년층 여성 생계부양자를 위한 일자리는 부업이 대부분이다. 학력이 낮고 기술이 없는 전업주부가 갑자기 생계 전선으로 내몰리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경쟁력 없는 이들에게 선택지는 좁다. 때문에 중년층 여성 생계부양자의 노동시장 참여가 부업이 아닌 생업이 되면 취약계층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커진다. 비정규직·저임금 일자리 밖에 없다. 이마저도 부족한 노후 준비로 길게 일해야 한다. 수명은 늘어나고, 모은 돈은 없으며, 자식에게 기댈 수 없는 ‘3중고’에 시달리게 된다. 나이 든 ‘일하는 엄마’의 상당수가 이렇다.


올해 63세인 박모씨는 중학교 졸업 후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일을 했었다. 스물 다섯에 9급 공무원이던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박봉인 공무원 남편을 도우려고 만화방·하숙집을 운영하기도 했고, 한복집에서 일하기도 했다. 1993년 남편이 불쑥 공무원을 그만두면서 박씨의 부업은 생업으로 돌변했다. 안경공장, 출판물류회사 등을 전전하면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2003년 이혼은 아예 박씨를 가장으로 만들었다. 혼자 가족을 책임져야 할 그에게 고된 노동은 불가피했다. 하루 12시간 식당 일을 해야 했고, 10년간 요양보호사로 근무해야 했다.


평생 11개 직업을 가졌지만 박씨에게 ‘정규직(직접고용·전일제·고용보장)’은 낯선 단어다. 마산수출자유지역, 출판물류회사에서 일했을 때가 정규직과 가장 비슷했다. 여기에다 경력이 없고, 기술이 없어 임금은 낮았다. 1970년대 마산수출자유지역 내 여성 시급은 남성의 40% 수준이었다. 2000년대 들어 요양보호사로 일 할 때는 월 130만원가량을 받았다. 박씨의 삶을 ‘나는 엄마가 먹여살렸는데’라는 책으로 펴낸 딸 김은화 작가는 “우리 삶 속에 있는 여성 생계부양자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으로 차별 받으면서 박봉으로 생계를 꾸려온 엄마들이다”고 강조했다.

박씨는 2014년에 40년에 육박하는 임금노동에서 은퇴했다. 딸과 아들이 취업할 무렵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서였다. 노후 준비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현재 박씨는 임대주택에 살면서 국민연금으로 빠듯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나마 박씨 같은 ‘불완전한 은퇴’라도 괜찮은 편이다. 이조차 꿈꾸지 못하는 여성들도 꽤 된다. 김모(65)씨는 서른 한 살에 대기업을 다니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평생 전업주부로 지낼 줄 알았던 그의 삶은 1999년 비틀어졌다. 실직 후에 사업을 하던 남편이 실패를 맛보면서 김씨에게 가장이라는 이름표가 달렸다. 겨우 찾은 직업은 보험설계사였다. 하지만 소득이 들쑥날쑥해 빚은 김씨 가족을 놓아주지 않았다.


자녀들이 장성하고 취업을 했지만 김씨는 여전히 일을 놓지 못한다. 남편은 생계를 꾸릴 능력이 없고, 모아놓은 빚은 한가득이다. 팍팍한 삶을 사는 자녀들에게 기댈 수도 없다. 김씨는 “살 날은 많이 남았는데 집과 돈은 없고, 일거리도 찾을 수 없다”며 “청소부나 요양보호사 같은 몸을 쓰는 일을 하려고 해도 건강이 좋지 않아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유제품 배달 일을 하는 40대 이모씨는 “저학력에 사회 경험이 없는 ‘엄마’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많지 않다”며 “대부분 ‘부업’ 성격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운이 좋아 전일제 일자리를 구해도 최저임금 수준이다. 만약 가정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한다면 앞이 깜깜할 것”이라며 “악조건에도 주변의 50~60대 엄마들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나도 자식들이 취직해도 일을 놓지 못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슬기 기자 sgj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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