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나의 것” 마침내 무용계도 외쳤다 “#METOO #WITHYOU”

국민일보

“내 몸은 나의 것” 마침내 무용계도 외쳤다 “#METOO #WITHYOU”

실명 내 걸고 연대하기 시작한 무용인들… 역사상 처음

입력 2019-09-14 09:00 수정 2019-09-14 09:00
게티

2년 전 시작된 미투 운동은 들불같았다. 다만 이후에도 꽤 오랜기간 침묵으로 일관하던 세계가 있었다. 순수 예술로 불리는 무용계다. 이들의 침묵은 무용계의 속사정을 읽어낼 중요한 단서였다. 이젠 달라졌다. 성폭력 사건에 소극적이었던 무용인들이 실명을 내걸고 연대하기 시작했다. 폐쇄적이었던 무용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그들은 왜 침묵할 수밖에 없었나, 그리고 왜 변했을까.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의 시작… 도화선 된 사건은

한국 무용 역사상 최초의 반(反)성폭력 연대가 형성된 건 지난 6월 14일이다. 무용인 단체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위드유’는 유명 안무가 류모(49)씨가 저지른 성폭력 사건이 알려진 이후 결성됐다. 무용인들이 실명을 내 걸고 성폭력 사건에 연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건은 2015년 일어났다. 류씨는 유명 현대무용 안무가이자 유명 무용단 대표인 남성 무용수다. 그가 개인 강습을 받는 학생 A씨(23)를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던 사건이 최근 드러났다. 개인 연습실에서 단둘이 있는 시간에 주로 벌어졌다. 수위는 갈수록 심해졌다. 처음엔 강제추행이었다가 나중에는 강제로 옷을 벗기고 성관계를 시도했다고 했다.

A씨는 더는 견딜 수 없어 의지하던 동료에게 도움을 청했고, 곧 류씨의 귀에 들어갔다. A씨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을 힘을 다해 류씨를 피하는 것 뿐이었다.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었다. 무용계 내부의 얽히고설킨 인맥 탓이다. 당시 A씨는 서울 소재 한 대학 실용무용예술학부 학생이었다. 학부장 이모씨는 류씨의 아내였다. A씨에게 류씨를 소개해준 사람도 이씨다. 이들 부부는 현대무용계 각종 협회·조직, 콩쿨, 대학 등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진 권위자다. 신고를 하는 순간 A씨는 평생 무용을 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4년을 숨어 지냈다. A씨는 이후 복학을 하고도 자신의 학교에 출강하던 류씨를 피해다녔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A씨는 2017년 여름 이씨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놨다. 이씨는 “니가 착각하는 걸 수도 있다. 다 잊으라”고 했다. 이후 A씨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A씨는 무용을 포기했다. 우울증, 불안장애, 대인기피 증상을 보여 치료를 받고 있다.

이게 ‘오롯#위드유’의 시작이었다. 그를 위해 지금까지 무용인 80여 명, 연극인 등 문화예술인 50여 명, 예술단체 10여 개가 연대서명으로 선언에 참여했다. 무려 700여 명이다. 그동안 침묵을 지켰던 무용계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활동이다.

‘오롯#위드유’는 “반복돼 온 성폭력에 대한 미성숙하고 무책임한 문화에 저항하고자 한다”며 “향후 재발방지가 가능한 현실적 대책을 세우기를 촉구한다. 피해자에 대한 출처와 진위가 불분명한 소문을 함부로 유포하지 말고 가능하면 피해 호소자에 대한 혐오 발언에 적극 대처해 달라”고 당부했다.

게티

무용계는 그동안 왜 침묵했나

여성 무용수들로 구성된 ‘페미플로어(Femifloor)’는 지난달 21일 ‘무용계 #metoo, 침묵의 카르텔을 깨다’라는 강연을 열었다. 류씨 사건이 알려지고도 대중적 관심을 얻지 못하자 피해자를 연대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이날 강연자로 나선 책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를 쓴 윤단우 작가는 “무용계는 사회에서 고립돼 있다고 여기는 무용수가 많았지만 이들 모두 연결돼 있다”며 “이같은 사실을 최근에서야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윤 작가는 “가장 오래된 식민지는 여성”이라며 “예술이라는 특수성을 방패삼아 성적 일탈이 용인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금기를 위반하며 기행을 펼쳤던 거장들을 견뎌왔지만 이제는 물어봐야한다. ‘그들의 일탈로 우리에게 대체 어떤 새로운 질서가 도래했는가’라고 말이다”라며 “이제는 확실히 안다. 예술가라고해서 (성폭력을) 해도 됐던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윤 작가에 따르면 무용수들은 도제식 학습을 받는다. 그러면서 제자는 스승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특히 무용계는 이 관계가 더 밀착돼 있다. 윤 작가는 “수직적 위계구조가 다른 예술계보다 단단하다”며 “어린 시절부터 성인까지 이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발설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특히 무용은 신체접촉 없이는 교육할 수 없다. 몸을 사용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지도자는 제자의 몸을 만질 수밖에 없다. 가해자는 교습과 성추행의 모호한 경계를 악용했고, 피해자는 폭로할 수 없었다. 폭행이나 협박도 없었고, 항거불가능한 상태도 아니었다. 윤 작가는 “사실 무용수들은 이게 성폭력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윤 작가는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을 말했다. 무용계의 경우 피해자(제자)는 가해자(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직감으로 안다. 윤 작가는 “이 관계는 단순히 명령과 복종으로만 구성되지 않으며 밀착된 관계에서 오는 침묵을 공포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무용계 사제관계는 자발적인 충성에 의해 유지되는데, 제자는 스승에게 필요 이상의 존경심을 갖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윤 작가는 “가스라이팅은 아래는 물론 위로도 향한다”며 “무용세계의 스승들은 예술에 헌신함으로써 본보기가 되고 제자들은 그러한 스승에게서 한 가지 가르침이라도 더 얻기 위해 자신을 낮춘다”고 설명했다. 이런 문화에서 무용수는 그루밍 성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신체주권’을 거듭 역설했다. 윤 작가는 “몸짓을 언어로 하는 이 세계에서 몸은 예술활동의 가장 중요한 도구”라며 “무용수 신체의 주인은 몸의 움직임 원리를 알려주는 스승”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무용계에서는 신체주권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라며 “맡긴건지, 빼앗긴 건지도 논의해봐야한다”고 했다. 또 “무용수는 성인일지라도 어린 시절부터 스승에게 길들여진 사람”이라며 “과연 신체주권을 스스로 보유하고 있는지 물어봐야한다. 무용수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라고 전했다.

특히 법조인들이 이런 심리적 배경을 명심해야한다고 했다. 무용계에서 스승은 제자의 몸, 동작, 시선을 모두 통제할 수 있다. 윤 작가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신체주권은 없다고 볼 수 있다”며 “그렇다면, 춤을 출 때는 없었던 신체주권이 갑자기 성적인 접촉이 생겼을 때는 발휘될 수 있겠나. 거부하지 않았다고 그걸 자신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나”라고 지적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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