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표창원 “화성연쇄살인사건, 삶 압도한 부채감이었다”

국민일보

[인터뷰] 표창원 “화성연쇄살인사건, 삶 압도한 부채감이었다”

입력 2019-09-19 18:38 수정 2019-09-20 11:11

1990년 11월 15일 경기 화성시의 한 야산. ‘화성연쇄살인사건’의 9번째 피해자가 발견된 이곳에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있었다. 표 의원은 당시 화성경찰서 소속 기동대 소대장이었다. 그로부터 29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은 표 의원에게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20년 넘게 증거물을 보존해준 수사팀에게 놀랍고 고맙습니다” 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표 의원은 가장 먼저 끝까지 사건을 놓지 않은 경찰에 감사를 전했다. 표 의원은 “현장을 본 순간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제 삶 전체를 압도하는 부채 같은 사건이 됐다”며 “진범을 잡지 못해 자괴감을 느꼈던 경험과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경찰대학교를 막 졸업한 새내기 경찰이었던 표 의원은 진범을 반드시 잡겠다는 사명감을 가졌지만 당시 기술로는 DNA를 분석할 수도, 용의자가 20대 남성이라는 것만 특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한계를 느낀 표 의원이 93년 영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계기 중 하나기도 했다.

다음은 표 의원과의 일문일답.

-29년 만에 진범이 잡혔는데 소회를 말해달라
=슬프고 참혹한 사건이었지만 기대를 하지 못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현장에 가기 전까지는 사실 막연한 사건이었다. 경찰대 졸업 후 살인사건 현장에서 시신을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순간부터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제 삶 전체를 압도하는 부채감으로 남았다. 화성경찰서에 있는 1년 동안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진범의 꼬리도 못 잡았다. 유사한 사건이 생기면 꼭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92년 대학입시 시험지 도난사건 진범도 잡지 못하면서 무력감이 커졌다. 내가 범죄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해서 영국을 가게 됐다.

-통상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의 증거물을 보존하나
=보통 안 한다. 그래서 이번에 수사팀에 너무 놀라면서 고마웠다. 화성연쇄살인 사건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용의자와 수사 경찰 중에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고 경찰이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경찰에게는 트라우마 같은 사건이었다. 수사를 이어나가면서 현장에서 수거한 증거물이 정말 많다. 9차 사건에서 제가 찾은 증거물만 해도 담배꽁초, 우유갑, 찢어진 속옷 등 여러 개였다. 경찰이 공소시효가 지난 이 사건의 증거물을 쥐고 있었던 한쪽에는 집념이, 또 다른 한쪽에는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범인이 어떤 사람일 것이라 대충 예상했나
=그때까지만 해도 경찰 수사 상식이 살인사건은 치정이나 원한, 금품을 동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또 피해자와 진범이 가까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런데 화성연쇄살인사건은 피해자와 일면식이 없는 데다 원한이나 치정 관계도 없는, 이상하고 엽기적이고 미스테리한 사건이었다. 당시 목격자와 생존자의 진술을 바탕으로 20대 초반의 남성이라는 초기 단계까지만 수사가 이뤄졌다. 그 이후에 프로파일링 기법이 도입됐다. 성적인 동기로 발생한 범죄라는 것, 야산처럼 험한 장소에서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대상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종합해봤을 때 상당히 성숙도가 덜하고, 충동이 강한, 여성 관계에 대한 사회적 기술이 떨어지는 20대 남성이라는 것까지 추론할 수 있었다.


-잔혹한 연쇄살인마가 1급 모범수였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연쇄살인범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다. 분노조절을 하지 못해서 수감 중에 말썽을 일으키는 유형도 있지만 모든 연쇄살인범이 그런 형태의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자신이 완전히 상대방의 우위에 서서 지배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폭력성을 전혀 분출하지 않는 유형의 연쇄살인범도 있다. 강호순이 그런 경우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행 수법을 보면 그런 범인의 습성을 볼 수 있다. 오랜 기간 잠복하고 기다리면서 한 상대를 노렸다. 자신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수감 생활을 모범적으로 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또 94년 처제 살인 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때도 감형을 위해 상당히 노력한 모습이 드러난다. 무기징역을 받아서 가석방을 노렸을 거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진범임을 들키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다시 나와 범행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간직했을 가능성이 있다.

-1차 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되나
=당연히 연관된다. 하나는 이해득실의 측면에서, 하나는 감정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혐의를 부인해서 실익이 있느냐의 여부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감형으로 인한 가석방이라는 실익이 있다.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어서 실질적 처벌로 이어지지는 못해도 추가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석방 배제가 될 수 있다. 감정적인 측면에서 이 사람을 보면 과시형 연쇄살인범은 아니다. 자신이 이 사건의 범인임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감추고 싶어하는 욕구와 감정이 있는 것이다.

-DNA 일치만으로 이 사건의 진범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나
=단답을 드리자면 가능하다. 그러나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다. 아주 이론적이기는 하지만 DNA의 일치율이 100%가 아니다. 그래서 보강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길태의 경우에도 DNA가 발견됐지만 성폭행 혐의는 인정하고, 살인 혐의는 부인했다. DNA만으로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살인죄가 입증됐다고 볼 수 없단 주장을 폈다. 그래서 경찰이 지금 하는 것처럼 차분하게 보강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당시 화성에 용의자가 있었는지 알리바이를 입증해야 하고, 범행 수법이 다른 범행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지 등을 채워야 한다. 하지만 이 숙제를 가장 쉽게 풀 수 있는 것은 자백이다.

-마지막 91년 10차 사건과 94년 처제 살인 사건에 3년의 공백이 있는데
=역시 추가 범행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연쇄살인에 공백기 혹은 냉각기라고 하는 게 있는데 이건 여러 이유로 발생한다. 범인의 내면에서 그 전 사건의 잔상이 오래 남아있어서 추가로 범행을 저지를 필요가 없을 때, 수사망이 강화되거나 언론의 압박으로 두려움을 느꼈을 때 등이다. 또 범행을 시도했는데 제삼자에게 들킨다거나 실패했을 때도 냉각기가 발생한다. 추가적인 수사를 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진범은 죽거나 복역 중이었을 것”이란 과거 예측이 주목받고 있다
=당시엔 말하지 못했지만 제3의 가능성이 있었다. 죽지도, 수감되지도 않았지만 범행 수법이 진화해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경우다. 이게 가장 두려운 시나리오였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봤을 때 이것은 중단될 수 없는 범죄였다. 연쇄살인범들은 범죄를 중단하지 못한다. 그런데 91년 이후 유사한 범죄가 발생이 안 했잖나. 그렇다면 죽거나 복역 중이거나 범행 수법이 진화했을 세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둔 거다. 연쇄살인범 중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다른 범죄를 저질러 수감되는 사람도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봤을 때 입법적으로 보완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나
=현재 살인죄 공소시효는 폐지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0년 8월 이전의 살인사건에는 공소시효가 적용된다. 전두환 특별법처럼 아주 예외적인 경우 헌법에서 허용하는 소급 입법을 통해 나중에 공소시효를 없애는 특별 입법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리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해도 사후적으로 소급해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증거물 보존과 관련한 입법적 보완은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으로 있을 때 지속적으로 경찰청에 요구해 보존 시설을 마련했다. 공소시효 폐지로 증거물 보존의 의무가 생기게 됐다. 관련 시행령과 규칙들은 제정돼있다. 문제는 지금 발생한 사건들은 괜찮지만, 과거 미제 사건들은 증거물이 보존이 잘 안 돼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가현 신재희 기자 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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