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쓰다듬던 자개농, 그 기법으로 살려낸 ‘바람의 제주’

국민일보

밤마다 쓰다듬던 자개농, 그 기법으로 살려낸 ‘바람의 제주’

정직성 작가 , 누크갤러리 개인전 ‘바람의 길’에서 실험작 선봬

입력 2019-10-20 16:21
손때 묻은 사물로부터 위안을 얻을 때가 있다. 정직성(43) 작가에게는 혼자 세상을 맞서야 했던 시절, 방을 듬직하게 채워준 중고 자개농이 그랬다. 칠흑 같은 검은 색 위로 희게 반짝이는 자개의 문양을 쓰다듬으며 한 시기를 견디었다.
'201920', 나전, 나무에 삼베, 옻칠, 2019년 작

새로운 가정을 꾸린 뒤 지난 2년간 제주살이를 했던 작가가 그곳의 바람과 현무암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표현하기 위해 자개농 제작에 쓰이던 나전칠기와 옻칠기법을 접목했다. 서울 종로구 평창34길 누크갤러리에서 열리는 ‘바람의 길’전에서 그 결과물인 ‘자개 회화’ 신작을 만날 수 있다.

이번에 나온 유화와 아크릴 회화도 바람과 현무암을 떠올리게 한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선 작품들은 바람을 시각화한 듯 휘몰아친다. 색의 밑바탕에는 심연처럼 검은색이 있다. 그 바람과 검은색에 관한 실험을 더 밀어붙인 게 자개 회화다.
'201922', 나전, 나무에 삼베, 옻칠, 2019년 작.

검은 밤에 핀 분분한 매화, 제주의 바람에 성내듯 포효하는 밤바다, 폭풍 치는 날 마을에 내려꽂히던 번개…. 유화나 아크릴의 붓질로 표현해오던 주제들이 나전기법으로 환골탈태한 것이다. 이를테면 촛불 시위에서 영감을 얻은 밤 매화 시리즈도 나전 기법으로 재탄생했다.

최근 갤러리에서 만난 작가는 “제주에서 2번의 태풍을 겪으며 바람이 아주 강렬했다. 장독이 날아갈 정도였으니까. 현무암의 검은색에는 어떤 숭고함 같은 것도 느껴졌다”며 “(4·3 항쟁 등)아픈 역사가 있는 제주라 동백의 해맑은 꽃도 그냥 보이지 않더라. 그 역사적 무게감을 같이 표현하고 싶었고, 검은색이 그런 역할을 할 거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914', 캔버스에 아크릴과 유채, 2019년 작.

말하자면, 추상표현주의적인 과감한 붓질이 어울릴 것 같은 주제에 그는 전통적인 나전칠기 기법을 끌어온 것이다. 나전칠기 명인 청봉 유철현씨가 운영하는 아리지안 공방과 협업했다. 정 작가는 “협업하는 장인들이 나전칠기가 쇠퇴해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전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는 욕구와 저의 생각이 서로 맞아떨어진다”고 말했다.

신작은 전통적으로 나전칠기 기법에서 꽃, 오리 등의 문양을 넓게 평면적으로 디자인하는 스타일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자개가 갖는 특수한 반짝임, 대상을 추상화시키는 측면이 있다”며 “공예적인 패턴을 넘어서, 표현주의적인 재료로 자개에 주목한다”고 강조했다. 11월 3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많이 본 기사

아직 살만한 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