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50원 오르자 거리가 불탔다…칠레 서민이 폭발한 이유

국민일보

지하철 50원 오르자 거리가 불탔다…칠레 서민이 폭발한 이유

심각한 빈부격차로 불만 누적…하위 50%가 부의 2.1% 나눠가져

입력 2019-10-21 16:26 수정 2019-10-21 17:18
19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지하철 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한 남자가 불타는 자동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산티아고 AFP=연합뉴스

최근 칠레 수도 산티아고를 불바다로 만든 시위의 발단은 지하철 요금 인상이었다. 출퇴근 시간대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이 800칠레페소(약 1320원)에서 830칠레페소(약 1370원)로 약 50원 올랐다. 유가 인상과 페소 가치 하락이 요금 인상의 원인이었다.

인상 비율로 따지면 4%에 못 미치는 수준인데, 이 요금 인상이 칠레 시민들을 거리로 뛰어나오게 만들었다. 지난 7일(이하 현지시간)부터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이어져온 이번 시위는 칠레 정부의 안일하고 무신경한 대처 탓에 시민들의 분노를 키우며 과격한 시위로 발전했다.

지하철 요금이 50원 오른 것을 계기로 시위대는 며칠째 거리에 나와 경찰과 맞서고 있고, 지하철역과 버스 등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격한 시위에 화들짝 놀란 정부가 뒤늦게 요금 인상을 철회했지만 시위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지난 19일(현지시간) 한 시위자가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칠레 국기를 흔들고 있다. 산티아고 AFP=연합뉴스

20일(현지시간) 시위대와 경찰 사이 충돌이 발생하면서 경찰이 한 시위자를 체포하고 있다. 산티아고 AFP=연합뉴스

이를 두고 칠레 언론들은 지하철 요금 인상이 단지 ‘빙산의 일각’이라고 지적했다. 지하철 요금 인상이 시위의 도화선이 되긴 했지만 그 아래에 놓인 심각한 빈부격차와 사회 불평등, 서민층에게 너무 높은 생활물가는 지속적으로 시민들의 불만을 키워왔다.

유엔 중남미·카리브경제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칠레에서는 상위 1%의 부자들이 부의 26.5%를 소유하고 있었다. 반면 하위 50%가 2.1%의 부를 나눠가졌다.

칠레의 올해 최저임금은 월 30만1000페소(약 49만7000원)이고, 근로자의 절반은 월 40만 페소(약 66만원)로 생활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월 환산액은 174만원이고, 근로자 평균 월급은 295만원(2017년 기준)이었다.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칠레의 최저임금과 월 평균 급여는 훨씬 낮았지만 지하철 요금은 서울보다 비쌌다.

이런 상황 탓에 칠레의 저소득층은 월급의 30%를 출퇴근 지하철 요금에 쓰고 있었다. 특히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은 시간대별로 다른데, 출퇴근 피크 타임에 가장 비싼 요금을 책정하고 있어 생계를 위해 지하철을 이용하는 서민들에게는 지하철 요금이 큰 타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BBC 스페인어판이 인용한 칠레 디에고포르탈레스대의 조사 결과를 보면 칠레 지하철 요금은 세계 56개국 중 9번째로 비싼 수준이었다.

아울러 대중교통과 전기, 수도요금 등 공공요금이 너무 자주 오르는 것도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이는 요인이 됐다.

지난 19일(현지시간) 시위대와 경찰간 충돌이 발생하면서 버스에 화재가 발생하자 소방관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산티아고 AFP=연합뉴스

지난 19일(현지시간) 시위대가 산티아고의 한 지하철역에 불을 질러 까만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산티아고 AFP=연합뉴스

이렇게 시민들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왔던 불만은 지하철 요금 인상을 계기로 지난 7일부터 조금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큰 소요사태 없이 이어지던 시위는 지난 18일 글로리아 후트 교통장관의 발표가 나오면서 급격히 폭력시위로 변질됐다.

장관은 “요금 인상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번복은 없다”고 강조하며 “정부의 보조금이 없다면 실제 요금은 두 배에 달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환승 혜택 등을 감안하면 요금이 다른 국가 대비 싼 수준이라고도 했다.

또 시위가 한창이던 18일 저녁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이 고급 이탈리아 식당에서 평온하게 밥을 먹는 사진까지 공개되자 상위 1%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더 커졌다. 비상사태 선포나 통행금지령 등 정부의 강경 대처도 시위에 오히려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시민들의 시위 격화로 비상사태가 선포된 산티아고에 19일(현지시간) 장갑차를 동원한 군인들이 출동,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 산티아고 AFP=연합뉴스

20일(현지시간) 칠레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가스를 발포하고 있다. 산티아고 EPA=연합뉴스

결국 시위는 더욱 과격해졌고, 혼란을 틈탄 상점 약탈도 이어지면서 칠레는 근 몇십년간 볼 수 없었던 최악의 혼돈에 빠지게 됐다.

이를 두고 야당 의원인 가브리엘 보리치는 “정부는 계속 폭력행위를 비판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의 행동은 폭력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며 “나태와 몰이해, 억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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