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복 입었으면 막 찍어도 되나?… ‘레깅스 불법촬영 무죄’ 논란

국민일보

일상복 입었으면 막 찍어도 되나?… ‘레깅스 불법촬영 무죄’ 논란

판결문에 피해 사진 첨부한 것도 이례적… ‘2차 가해’ 우려

입력 2019-11-06 05:00
게티이미지뱅크

레깅스 입은 여성을 불법촬영한 30대 남성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이 재판 결과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특히 불법촬영된 신체의 노출 부위가 많지 않아 성적 수치심을 주지 않으며 레깅스는 일상복에 해당한다는 재판부의 무죄 판결 근거에 대해 ‘일상복이면 상대 동의 없이 촬영해도 된다는 것이냐’ ‘성적 수치심을 누가 판단하는 것이냐’ 등의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불법촬영에 대한 죄를 지나치게 가볍게 봤다는 비판도 있다. 또 재판부가 판결문에 이례적으로 불법촬영 사진을 첨부한 것에 대해서도 피해 여성에게 2차 피해가 될 수 있고 유출 우려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치심 유발 않는다”며 불법촬영 무죄낸 항소심
의정부지법 형사합의1부(부장판사 오원찬)는 지난달 24일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카메라 등 이용촬영)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30대 남성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벌금 70만원을 선고한 1심과 판결이 엇갈렸다.

A씨는 지난해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B씨 엉덩이 부위 등 하반신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8초간 불법촬영하다 적발됐다. 1심은 벌금 70만원에 성폭력치료프로그램 24시간 이수를 명령했다. A씨는 양형 부당을 이유로 항소했고 2심은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사진에 담긴 피해자의 신체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부위와 노출 정도는 아니라고 봤다. 피해자는 엉덩이 위까지 오는 회색 운동복 상의를 입고 하의로 레깅스를 입었다. A씨는 그의 신체 전체를 뒤쪽에서 촬영했다. 재판부는 특별히 엉덩이가 부각되지 않아 문제가 안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입고 있던 레깅스는 일상복으로 이용되고 있고 피해자 역시 레깅스를 입고 대중교통을 이용 중이었다”며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라고 해서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신체 노출 부위가 많지 않은 점 ▲촬영 각도가 일반적인 사람의 시선인 점 ▲디지털 포렌식을 거친 휴대전화에서 추가 입건대상이 발견되지 않은 점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은 점도 고려됐다.

판사에 따라 제각각… 法 성인지 감수성 어디에
이번 판결에 대해 도진기 변호사는 “성적 수치심 개념 자체가 굉장히 불확정해 판사의 해석에 달린다”면서 “(하지만) 이 해석은 판사 마음대로 하라는 게 아니라 사회 상식에 따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인 권김현영 씨는 “보통 이상한 판결은 이상한 방식으로 상황을 쪼개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촬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피해자의 옷차림을 보았을 때 성적 의도가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고 분리하면서 레깅스는 평상복이라는 의견을 제출했다”며 “판사 개인이 레깅스라는 옷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판사는) 자신의 사적 취향이 공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무려 판결의 근거로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피의자는 유무죄 여부가 아니라 스스로 유죄라는 것을 인정한 채 양형부당만 항소했다. 양형이 ‘과다’하다고 항소했는데 의정부 형사1부 오원찬, 박세황, 고준홍 판사는 굳이 이것을 다시 무죄로 판단했다”며 “재판부는 불법촬영 관련 위법 사실은 완전히 눈감았다”고 비판했다.

이어 “전체 성폭력 범죄에서 카메라 이용 촬영건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불법촬영 문제에 대해 수많은 여성이 국가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이따위 판결이 그 응답인가. 왜 성적 수치심을 언제 어떻게 느껴야 한다고 피해자에게 강요하는가”라며 “수치심은 피의자를 비롯해 재판부가 가져가야할 감정이다.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한다”고 질타했다.

2차 피해는? 판결문에 불법촬영물 넣은 재판부
2심 재판부는 무죄 판단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판결문에 피해 사진을 실었다. 피해자 동의는 없었다. 법원이 2차 가해를 자처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판결문은 ‘피고인이 휴대전화기의 카메라 촬영 기능을 이용하여 레깅스 바지를 입고 있는 피해자의 엉덩이 부위 등 하반신을 약 8초 동안 피해자 몰래 동영상 촬영하였다’며 공소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이 사건 동영상은 피고인이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서 있는 피해자의 뒤에서 피해자 몰래 촬영한 것’이라고도 썼다.

여기에 피해 여성 뒷모습 전신이 담긴 사진 원본을 넣으면서 외부로 살이 보이는 부분은 목과 손, 발목밖에 없어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 부위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해당 사진은 의정부지법이 공식 누리집에 올린 판결문에는 비공개 처리 됐지만 A씨에게 송부된 원본엔 사진이 포함돼 있다. 다른 판사들도 내부 열람 시스템을 활용해 검색할 수 있다.

의정부지법 관계자는 “(판결문에) 사진이 첨부된 것은 맞지만 피고인과 내부 열람을 위한 판결문이라 유출 가능성은 적다”고 해명했다.

굳이 사진 넣을 이유 있었나
피해 여성은 자신의 신체가 불법촬영됐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도리어 이 사진을 공적인 기록물에 남겼다. 판결문에 불법촬영된 사진을 남긴 것은 이례적이다. 사진이 재판 기록에 남을 경우 불법촬영 범죄 피해자가 소극적으로 대처할 우려가 있다. 2차 피해 가능성도 신중하게 따져봐야한다.

피해 여성 측은 “통상 ‘증거목록 몇 번 휴대폰 영상에 의하면’ 같은 식으로 표현한다. 판결문에 직접 사진을 첨부한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라며 “반드시 사진이 필요한 경우도 아니라 유감스럽다. 판결문 열람복사 제한을 법원에 신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은순 젠더법학회 회장은 “해당 사진은 (피해자를) 특정 가능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굳이 필요하지도 않다. 여성을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라며 “당시 여성이 입고 있던 옷차림은 글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사진을 첨부할 필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권김현영 씨는 “재판부는 사진을 판결문에 첨부하면서 불법촬영물 유포라는 새로운 범죄를 저질렀다”며 “불법촬영을 해도 걸리지 않는 매우 구체적인 방법마저 제시했다. 이 판결문은 사적이고 범죄 그 자체인 공문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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