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만드는 계급 장벽…영국 밑바닥 탁아소의 변화를 담다

국민일보

정치가 만드는 계급 장벽…영국 밑바닥 탁아소의 변화를 담다

[책과 길]아이들의 계급투쟁/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사계절/ 332쪽/ 1만7000원

입력 2019-11-06 16:51
한 영유아 보육 시설의 촬영한 사진이다. 저곳에 다니는 아이들은 어떤 계급의 자녀들일까. 확실한 건 갈수록 높아지는 계급 사이의 장벽 탓에 저 보육 시설 부모들 역시 서로 비슷한 계급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픽사베이

“우리 센터는 평균 수입, 실업률, 질병률이 전국에서 최악의 1%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 가정의 긴급한 요구에 부응하여 그들과 함께 상황을 개선해왔습니다. 우리 센터는 완벽하게 자원봉사자로만 운영되는 자선단체이며, …긴급한 상황에 처한 가정, 실직 가정, 저소득 가정의 아이들을 무료로 맡길 수 있는 부설 탁아소를 운영합니다. 이 아이들의 부모가 그런 것처럼 아이들 또한 심각하고 다양한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아이들과 당신도 일해보지 않겠습니까.”

저자가 저런 공고문을 마주한 건 2008년이었다. 어쩌면 허투루 보고 넘길 만한 글. 한데 무엇에 홀린 듯이 저자는 탁아소에 전화를 걸었고, 자원봉사를 시작했고, 그의 삶은 크게 출렁이게 됐다. 탁아소를 통해 세상의 밑바닥을 확인했다고나 할까. 탁아소에 아이를 맡긴 부모들은 약물이나 알코올에 중독돼 허랑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이들을 수렁에서 건져내는 일은 무망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렇다면 이 책은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한 이야기를 담은 그렇고 그런 르포르타주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반쯤만 맞다. 저자는 못 가진 사람들의 신산한 일상을 그려내면서 질 나쁜 정치가 밑바닥 사회를 어떻게 뒤흔드는지 들려준다.

정치가 만든 계급 장벽

책의 배경이 되는 곳은 영국의 남부 도시 브라이턴이다. 저자인 브래디 미카코(54)는 일본인으로 1996년 영국으로 건너가 20년 넘게 영국에서 살고 있다. 한때 그는 런던의 한 일본계 기업에서 일했고, 현재는 저술 활동을 하면서 고국에서 상당한 필명을 날리고 있다. 실제로 책을 읽으면 그의 필력에 감탄하게 된다. 특별히 멋부린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핵심을 파고드는 내용이 곳곳에 등장하고, 흡인력도 상당해 속절없이 책장을 넘기게 된다.

우선 저자가 ‘무직자와 저소득자를 위한 지원센터’에 있는 탁아소에서 일하게 된 시기부터 살펴보자.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한 2008년 9월은 진보적 성향의 노동당이 정권을 잡은 때였다. 영국 사회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 정책이 얼마간 존재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곳에서 2010년 10월까지 일하다가 민간 어린이집으로 이직했다. 그리고 2015년 3월 탁아소로 복귀해 이듬해 10월까지 일했다(2015년 10월 탁아소는 문을 닫았고, 이곳은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푸드뱅크’로 바뀌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저자가 근무한 두 시기에 탁아소가 처한 현실이 너무 달랐다는 점이다. 2010년 5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고 각종 복지 예산이 많이 삭감되면서 탁아소는 긴축의 칼바람을 맞았다. 저자는 2008~2010년 일한 탁아소를 밑바닥 아이들을 맡았다는 의미에서 ‘저변 탁아소’로, 2015~2016년 근무한 탁아소는 긴축 정책의 영향을 받던 시절이라는 뜻에서 ‘긴축 탁아소’로 각각 명명해놓은 뒤 인상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뾰족하게 느껴지는 대목 중 하나는 탁아소를 통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계급 사이의 장벽을 살핀 대목이다. 저자는 하층 계급 탁아소에 다니다가 2010~2015년에는 중산층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근무한 덕분에 기우뚱해지는 영국 사회의 불평등 실태를 체감할 수 있었다. 중산층 부모를 둔 아이는 하층 계급 자녀들보다 풍부한 어휘를 구사했고 숫자를 셀 줄 알았다. 그는 “놀라운 것은 (중산층) 아이들의 손끝이 야무지다는 점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유아기의 뇌 발달은 손가락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어린이집 3세 아동은 저변 탁아소의 3세 아동이 절대로 접을 수 없는 형태로 솜씨 좋게 종이를 접을 수 있다.”

어느 사회나 부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있는 법이지만 문제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경멸의 시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한때 이뤄진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빗대 계급 사이의 분리를 뜻하는 ‘소셜 아파르트헤이트’의 실태를 전한다. 그러면서 “유아 교육 현장에서 계급 분리가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긴축 탁아소 시절로 진입하면서 탁아소의 외국인 부모들까지도 하층 계급 영국인을 대놓고 낮잡아보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런 실태가 “신자유주의의 영락한 모습”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이유가 정치 탓이라고 말한다. “탁아소는 땅바닥과 정치학을 이어주는 장소였다. 그런 장소가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천지에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이 굴러다니고 있다는 걸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땅바닥에는 정치가 굴러다니고 있다.”

'아이들의 계급투쟁' 저자인 브래디 미카코. ⓒTokyo Shimbun


마음의 디플레이션

책은 시간을 역행하는 구성을 띠고 있다. 긴축 탁아소에서 근무한 최근의 이야기가 전반부를, 저변 탁아소 시절을 다룬 내용이 후반부를 각각 장식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런 구성을 통해 지금은 없지만 과거엔 존재했던 무언가를 뒤늦게 감지하게 된다.

물론 저변 탁아소 시절에도 탁아소에선 “도덕이고 뭐고 다 붕괴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당시 시설에는 얼마간 활기가 감돌았었다. 기부금도 적지 않았다. 장난감도 많았다. 한데 긴축 탁아소가 처한 현실은 참혹했다. 부모들은 과거보다 훨씬 강퍅하게 굴었다. 장난감도 부족했다. 저자는 탁아소 동료와 부모들에 관해 이런 말을 나눈다.

“왜 이렇게 분위기가 거칠어졌을까.”
“여유가 없어서 그래. 작은 파이를 서로 빼앗으려 하는데, 그 파이가 점점 작아지고 있으니까.”
“아아, 역시 긴축이 문제인가.”
“재정 지출이 줄어들면 사람의 마음도 작아지는 모양이지.”

그러면서 저자는 ‘마음의 디플레이션’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긴축 시대’가 사람들 마음을 쪼그라들게 만든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역만리 떨어진 영국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정치적인 메시지가 한가득 담겨 있지만 그래도 백미는 곳곳에 등장하는 가없이 아름답고 더없이 아픈 이야기들이다. 탁아소 출신으로 어른이 돼 다시 탁아소를 찾아 보육사로 일하게 된 로자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탁아소 아이들은 어른이 손을 뻗으면 학대의 트라우마 탓에 몸을 움츠리곤 하는데, 로자리는 이런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깜짝깜짝 놀라면 그게 더 마음에 안 들어서 너를 더 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맞고 싶지 않으면 당당해야 해.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다 보면 그렇게 되어 있을 거야.”

어머니가 없어서 중국인 아버지가 도맡아 키운 마야의 사례도 코끝을 알싸하게 만든다. 마야는 시설에 있는 식당에서 주스를 엎지르는 바람에 아버지한테 크게 혼이 난다. 저자는 속옷과 바지를 갈아입힐 요량으로 마야의 손을 잡고 탁아소로 데려간다. 한데 아이는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흘릴 뿐 소리 내 울지 않는다. 저자는 “소리 내지 않고 흐느끼는 아이들, 나는 이런 아이들을 알고 있다”며 “민간 어린이집에서는 이런 아이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발을 갈아 신기고 있으려니 ‘마미’라고 마야가 영어로 말했다. 나는 못 들은 척하며 마야를 안아 올렸다. 마야는 무척이나 가벼웠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많이 본 기사

아직 살만한 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