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시간, 겨울방학

국민일보

어른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시간, 겨울방학

[김필균·임경섭의 같이 읽는 마음] 겨울방학/ 최진영 지음/ 민음사/ 304쪽/ 1만3000원

입력 2019-11-06 16:51
소설집 '겨울방학'을 출간한 작가 최진영. 민음사 제공

11월이다. 올해가 아직 한 달여 더 남아 있지만, 이쯤 되면 한 해를 다 보낸 것만 같다. 무성했던 나무가 색이 바랜 나뭇잎을 속절없이 떨어뜨리는 것을 보면서, 불현듯 불안해지는 때도 이즈음이다. 올 한 해 무엇을 했는지 곱씹다가 기억할 만한 것이 없어 한숨을 쉬기도 하고, 그간 미뤄둔 일을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안에 다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조바심을 부리기도 한다. 막상 새해가 되면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될 뿐이지만, 그리하여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나와 매일같이 맞이하는 오늘을 확인할 뿐이지만, 공기가 차가워지고 코끝이 시려올 때면 마침표를 찍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마치, 서른이 되면 매일 이별하며 살게 되리라는 듯이 ‘서른 즈음에’를 사무치게 부르던 스물아홉처럼. 더 이상 그 노래를 부르지 않을 서른 이후의 시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처럼. 이제는 이렇게나 다 알고 있는데, 그래도 여전히 나는 11월이면 마침표를 찍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겨울이 지나면, 한 살 더 나이가 들기 때문이다. 하여 겨울의 문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이가 드는 것을 싫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으나, ‘이렇게 나이 들어도 되는가’ 하는 고민은 매해 찾아온다. 그것은 ‘나는 어른인가’ 하는 질문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최진영의 두 번째 소설집 ‘겨울방학’은 그래서 이 계절, 이런 마음에 읽기에 안성맞춤인 책이다.


표제작 ‘겨울방학’은 화자인 ‘이나’가 아홉 살 겨울방학을 고모의 집에서 보냈던 기억을 떠올리는 이야기이다. 유명 브랜드의 아파트에서만 생활해온 이나는 고모가 사는 빌라촌의 원룸이 이상하고 불만스럽기만 하다. 텔레비전도 없고, 냉장고 소리도 크게 들리고, 무엇보다 신발장이 없어서 집안 어디에서나 신발이 보이는 것이 그렇다. 고모에게 신발이 두 켤레밖에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 급기야 이나는 고모의 ‘가난’을 대놓고 비난하기까지 하는데, 그런 이나에게 고모는 모든 사람이 그런 아파트에 사는 건 아니라고, 고모는 고모 집이 좋다고 다정하게 대꾸한다. 하지만 그전까지 “고모를 조금 이상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이나는, 고모와 함께 생활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모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른인 척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문득, 나도 어린 이나처럼 ‘어른’에 대한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래도 지금의 내 모습을 아닐 거라고 여기는 나 말이다.

어른이 된 이나는, 연차도 휴직계도 낼 수 없는 프리랜서였던 고모가 한 달 동안 일을 포기하고 자신과 함께한 그 겨울을 떠올리면서, 가끔 “정말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그 시절 고모가 했던 말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네가 내게 배운 것이 가난만은 아니라면 좋을 텐데”라는 고모의 바람이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여전히 “그 나이 되도록”이라는 말을 듣고 살지만, 누구에게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을 지켜가는 어른. 11월, 나도 내년엔 이나의 고모와 같은 어른에 가까워질 수 있길 바라본다.

모두 10편의 작품이 실린 이 책에는 어두운 모습의 어른들도 등장한다. “나쁜 것을 나누며 먹고사는 어른”, “괜찮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겠지, 괜찮겠지, 아직은 괜찮겠지, 기만하는 수법에 익숙해져버린 형편없는 어른”(‘돌담’).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떤 척을” 하는 어른(‘가족’).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 살다가“ 스스로를 고립과 단절의 상태에 가둬버린 어른(‘囚’). 지금의 나에게는 훨씬 익숙한 ‘어른’이지만, 내가 바라는 모습은 아니다. 그들은 아직, 겨울에 갇혀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지금의 혹한을 걸어 나오는 길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린 영영 같이 있을 거”(‘어느 날(feat. 돌멩이)’)라는 믿음이나 “무언가를 기다리는”(‘오늘의 커피’) 시간 같은 것. 그 혹독한 겨울을 통과하고 나면, 그들도 내가 바라는 어른과 조금 가까워지지 않을까. 어른은 나이로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마음이 자라는 일이라는 걸, 나는 이 책에서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김필균 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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