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만한 세상] 할머니 치고도 그냥 간 아우디…추격전 끝 ‘정의구현’

국민일보

[아직 살만한 세상] 할머니 치고도 그냥 간 아우디…추격전 끝 ‘정의구현’

입력 2019-12-24 11:17

운전 중 뺑소니를 목격하자 직접 추격전을 펼쳐 결국 뺑소니범을 잡은 한 남성이 있습니다. 손수레를 끌고가던 할머니를 치고도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 자리를 떠버린 아우디 차주를 끝까지 쫓아간 남성은 차주를 신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난달 26일 오전 8시30분쯤 인천 연수구의 한 도로 끝자락에는 67세의 할머니 A씨가 헌옷 등을 실은 작은 손수레를 끌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키만한 높이로 헌옷을 겹겹이 쌓아둔 채 천천히 걸어가던 할머니는 갑작스레 아우디 승용차와 부딪히며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도로를 달리고 있던 목격자 이모(55·남)씨를 앞서가던 아우디가 차선을 변경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할머니를 들이받은 겁니다. 할머니는 승용차와 부딪히자 끌고가던 손수레와 함께 길가에 넘어졌습니다. 그 순간 아우디는 주춤하며 멈춰서는 듯했지만 그대로 속도를 올려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우디 승용차의 사고 당시 블랙박스 화면. 차량 오른편에 할머니 키만한 높이로 겹겹이 쌓인 헌옷 등이 묶인 손수레가 보인다. 인천 연수경찰서 제공

바로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씨는 우선 119에 신고한 뒤 아우디를 뒤쫓았습니다. 수백m를 추격해가던 이씨는 아우디가 정차 신호에 서있는 다른 차들로 가로막히자 이때를 틈타 아우디 바로 뒤에 자신의 스타렉스 차량을 세워 도주로를 막았습니다.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감지한 다른 차량들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우디 차주는 사방이 다른 차량들에 둘러싸인 채 꼼짝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씨는 차량에서 내려 아우디 운전자 B씨(24·여)를 차 밖으로 나오게 한 뒤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B씨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했고, ‘면허취소’ 수치인 0.121%가 나왔습니다. B씨는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뒤 차를 몰았고 할머니를 치고도 모른 척 그 자리를 도망쳤던 겁니다. 경찰은 B씨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치상 및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이씨는 “할머니가 쓰러졌는데도 운전자가 그냥 달아나는 모습을 보고 쫓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나처럼 행동했을 것”이라고 겸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경찰은 기지를 발휘해 뺑소니범을 붙잡고 추가 피해를 막은 이씨에게 신고보상금 90만원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전했습니다.

뺑소니 상황을 보고도 못 본 척 갈 수도 있었지만 이씨는 혹시라도 다쳤을 할머니를 위해 119를 부르고 뺑소니범을 끝까지 쫓아가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만약 이씨가 그 자리를 그냥 지나쳤다면 할머니는 뺑소니범을 잡지 못한 채 홀로 집에서 치료를 했어야할지도 모릅니다. B씨는 뺑소니를 쳤지만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을 수 있었겠죠.

하지만 이 상황을 외면하지 않았던 이씨 덕분에 할머니는 적절한 보호 조치를 받았고, B씨는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됐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 영웅들이 있어 따뜻한 연말, 희망찬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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