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괜찮아] “전 듣지 못하는 왕따였습니다”

국민일보

[달라도 괜찮아] “전 듣지 못하는 왕따였습니다”

입력 2019-12-30 00:28 수정 2019-12-30 11:28
노선영 작가가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오른쪽 사진은 노 작가의 학창시절 모습. 최민석 기자, 노 작가 제공

“뛰어내리려는 순간 엄마 얼굴이 딱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다짐했어요. 죽을 각오로 살자.”

중학교 화장실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려던 열여섯 여중생은 30대가 되어 그날을 회상했고, 희미하게 웃었다. 어릴 적 생일 파티에 초대한 친구들이 오지 않아 다 식은 요리를 앞에 두고 엄마와 부둥켜 안은 채 울었다. 전학 간 시골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해 4칸짜리 좁은 화장실에 몇 시간이고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뛰어내리자’ 마음을 굳혔다.

선천적 청각장애를 가진 노선영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한계뿐이었던 날들을 극복했고, 지금은 두 권의 책을 펴낸 저자가 된 그는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를 찾아 지난 삶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줬다.

따돌림이 일상이던 ‘적막’ 속의 나

노 작가는 자신의 비밀을 알아챈 그 날을 기억한다. 어두운 방 안에서 잠이 깼다. 벽을 더듬거리다가 쿵쿵 두드려보고 엄마를 부르며 울어도 봤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공포감에 휩싸였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장애를 두려움으로 처음 인식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노 작가의 어린시절 모습. 노 작가 제공


학창시절은 불우했다. 특수학교인 애화학교에 다닐 때는 수화로 소통했지만, 10살 때 일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고부터는 지독한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딸이 갇혀있기를 원치 않았던 부모님은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노 작가는 “선생님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동냥’을 하면서 살았다”며 “필기 노트를 겨우 빌려 똑같이 받아 적은 뒤 공부를 다시 했다”고 회상했다.

사춘기 시절은 더 끔찍했다. 집안이 기울어 반이 2개뿐인 시골 학교로 옮겨 갔지만 그 곳에서의 생활은 지뢰밭을 걷는 듯했다. 노 작가는 “장애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내 친구들도 그랬다. 텃세를 부리고 나를 따돌렸다”며 “날 찾지 못하도록 화장실에 숨어있었다”고 털어놨다. 그가 ‘죽고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이때였다. 노 작가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눈앞에 부모님 얼굴이 보이더라”며 “이렇게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포기의 순간을 겨우 넘어섰지만 삶은 순탄치 않았다. 노 작가는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학원을 찾아가 강의를 해달라고 하면 모두 거부했다”며 “무언가를 배우겠다고 하면 ‘돈이 없을 거다’ ‘그런 건 잘 모를 거다’라며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배우려는 그의 열정을 세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애쓸 필요 없어” 한계를 강요한 세상

뭐든 배우려 애쓰지 말고, 홀로 서지 말라고 강요한 세상에서 노 작가는 꽤 많은 꿈을 이뤄냈다. 책을 냈고 강연자로 단상에 선다. 평생의 짝을 만나 결혼도 했다. 기회가 저절로 주어진 건 결코 아니었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한계를 깨기 위한 도전은 스무살이 되던 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노 작가는 스무살 이전의 자신을 “평범했고 도전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그를 바꾼 건 대학교 1학년 때 떠난 국토대장정이었다. 그는 “참가자 중 장애인은 나 혼자였다”며 “중간중간 친구들은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괴로웠지만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응원을 받던 이들이 하나둘 포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노 작가는 꼬박 한 달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는 완주하던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나도 할 수 있다, 장애인이어도 할 수 있다’는 통쾌함을 느꼈다. 기적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노 작가 제공

그 뒤로 노 작가의 배움의 열정도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눈에 띤 게 세계 글로벌 리더들이 모이는 ‘세계지식포럼’이었다. 포럼에 참여하고 싶어 찾아봤지만 장애인에 대한 배려나 관련 제도는 전혀 없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벽 앞에서 돌아섰겠지만 이번에는 부딪혀보기로 했다. 노 작가는 포럼 사무국에 “지식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평등해야 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이메일 한통은 큰 변화를 불러왔다. 포럼에 장애인 할인제도가 생겨나고 수화가 공식 언어 중 하나로 채택된 것이다.

노 작가는 “당시 포럼 관계자가 ‘장애인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하더라”며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내가 행동하니 사회가 변했다”고 말했다.

나홀로 유학, 강연… 도전은 현재진행형

이렇게 얻은 깨달음은 더 큰 도전으로 이어졌다. 노 작가는 2014년 아일랜드로 ‘나홀로 유학’을 떠났다. 들리지 않는 몸으로 가족도 친구도 없는 타국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의심 속에 도전했고, 그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같은 해 첫 책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을 세상에 내놨고 한국어, 영어, 한국 수어, 아일랜드 수어, 국제 수어 등 5개 국어를 완벽히 해냈다. 돌아온 뒤에도 글쓰기에 몰두해 지난해 두번째 작품 ‘고요 속의 대화’를 펴냈다.

아일랜드 유학, 국토대장정, 여행 등 도전하는 노 작가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가득했다. 노 작가 제공

강연자로서 단상에 서는 일도 한계에 맞서기 위한 노 작가만의 도전이었다. 할 수는 있겠지만 ‘잘’ 할 수 있을까. 모두들 우려의 눈길로 바라봤다. 노 작가 역시 “말을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청각장애인 강사는 거의 없다”며 현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열정과 용기를 증명하며 한꺼풀씩 편견을 벗겨내고 있다. 그리고 ‘잘’ 해내기 위해 필요한 건 단 하나, ‘진심’이었다. CBS 강연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출연해 큰 화제를 모았던 것도 “내 마음을 다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그는 자평했다.

노 작가에게는 꼭 서고 싶은 ‘꿈의 강단’이 있다. 모교다. 10대 시절의 그가 화장실에 숨어 죽고싶다고 생각했던 그곳에 다시 돌아가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노 작가는 “장애인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경험이 있는 내가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돌림으로 물든 기억밖에 없지만 그는 학교와 친구들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또 다시 화장실에 숨어 우는 아이가 없기만을 바랄뿐이라고 했다.

노 작가는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 『고요 속의 대화』 등 지금까지 총 두 권의 책을 펴냈다. 노 작가 제공

“결국 좋은 날이 왔다”

고통의 순간을 버티게 한 힘에 대해 묻자 노 작가는 “도전하는 열정에 장애는 없다는 게 나의 신념”이라고 답했다. 그 확고한 신념을 직접 실현하고 싶었고, 같은 아픔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줘야했다. 그렇게 끈질기게 달려 결국 해냈다. 서점에 노 작가의 책이 쌓였고 독자들의 응원이 쏟아졌다. 이렇게 이뤄낸 성과들은 그의 한계를 더 이상 한계로 느끼지 않게 했다. 노 작가가 힘들었던 기억을 다시 꺼내며 한 말은 “결국 좋은 날이 왔다”였다. 뛰어내리겠다는 선택을 돌이키지 않았다면 지금의 소중한 시간을 누리지 못 했을 것이라는 안도가 담겨있다.

노 작가가 2017년 '따뜻한동행 토크콘서트'에서 강연하고 있다. 따뜻한동행 제공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한계를 느끼고 있을 누군가에게 “나를 지우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단단한 조언을 건넸다. 노 작가는 “누구에게나 어려움은 있다. 그걸 물리치고 한계를 깨뜨릴 때 진짜 내 세상을 알게 된다”며 “나는 그것을 위해 다른 나라에서 공부했고 비장애인을 상대로 강연을 한다. 한계가 있어 조금 더 열심히 살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처음에는 내가 장애인이라는 게 너무 싫었다. 수화를 쓰면 사람들이 계속 쳐다봤고 그게 너무 창피했다”면서 “나는 내 장애를 받아들였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스스로를 인정하면 된다”고 당부했다.

“장애인의 유쾌함, 봐줬으면”

노 작가는 얼마 전부터 초등학교에서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이 활동을 꼽았다. 그는 “장애인에 대한 교육을 어린 나이에 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선입견과 나쁜 편견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어린이 중심의 교육을 이어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계를 강요했던 사회를 조금씩 바꾸는데 힘을 쏟겠다는 의지다.

질문에 답하고 있는 노 작가. 최민석 기자

그가 인터뷰 내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바꿔 달라”고 한 것도 같은 의미다. ‘불편하겠다’ ‘불쌍하다’ ‘뭘 할 수 있겠어’ ‘어쩌다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흔한 시선을 거둬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노 작가는 “오히려 장애는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면서 “만약 내가 비장애인으로 태어났다면 그 누구보다 지루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며 “오히려 장애를 가진 내가 이 사회에 점을 찍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지금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노작가는 어떻게 하면 더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들리지 않는 대신 더 많이 보고 듣고 말하려 한다. 지난달에는 사회복지법인 ‘따뜻한동행’에서 진행한 첨단보조기구 지원 사업의 도움을 받아 도전의 폭을 넓혔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즉시 문자로 옮겨주는 전자 탭을 선물받았다. 덕분에 강의를 듣는 일도, 필담 회의도 훨씬 수월해졌다. 입모양만으로 소통해왔던 노 작가는 “학원이나 포럼에 갈 때 챙겨 다닐 것”이라며 설레어했다.

노 작가가 2017년 '따뜻한동행 토크콘서트'에서 강연하고 있다. 따뜻한동행 제공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지난 삶을 한마디로 정의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려운 질문 앞에서 노 작가는 번뜩 환한 표정을 짓더니 ‘유쾌’라는 단어를 꺼냈다. 장애를 가졌다고해서 늘 우울 속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한계에 정면으로 맞서며 쌓아온 용기가 단박에 느껴지는 답이었다. 잘 어울리는 대답이라고 감탄하는 사이 노 작가가 말을 덧붙였다.

“귀가 안 들려 수화를 쓰고, 앞이 안 보여 지팡이를 듭니다. 조금 더 다양할 뿐입니다. 저의 유쾌함을, 장애인의 유쾌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세요.”

문지연 기자, 영상=최민석 기자 jymoon@kmib.co.kr

많이 본 기사

아직 살만한 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