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만한 세상] “녹슬고 때묻은 돈도 좋은 곳에…” 14년째 기부 ‘동전천사’

국민일보

[아직 살만한 세상] “녹슬고 때묻은 돈도 좋은 곳에…” 14년째 기부 ‘동전천사’

2005년부터 매년 익명으로 기부하고 사라져

입력 2020-01-02 11:36 수정 2020-01-02 14:49
그간 동전천사가 기부하고 간 동전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2008-2013-2014-2015-2016-2019년 기부된 동전들. 연합뉴스

부산 해운대에는 추운 겨울 날씨를 매년 따뜻한 마음으로 녹이고 다니는 ‘동전천사’가 있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익명의 기부천사는 2005년부터 14년째 1년간 모은 동전을 주민센터에 두고 갔습니다. 액수는 매년 달랐지만 항상 ‘더럽고 구겨진 돈도 좋은 곳에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쪽지와 함께 상자와 저금통을 가득 채운 동전을 몰래 전달해왔다고 합니다.

지난달 27일에도 동전천사는 어김없이 반송2동 행정복지센터를 찾았습니다. 동전천사는 동전이 가득 담긴 종이상자를 두고 갔습니다. 상자 안에는 10원짜리부터 500원짜리까지 종류별 동전이 여러 봉지에 나뉘어 담겨있었습니다.

이날 전달된 동전은 72만6920원. 상자 안에 별다른 종이쪽지는 없었지만 행정센터 직원들은 매년 이맘때쯤 동전천사가 기부해왔기 때문에 이번 기부도 그의 선행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2005년 “좋은 곳에 써달라”며 동전이 가득 담긴 종이상자를 들고 왔던 한 남성은 그 이후로 매년 이렇게 종이상자와 저금통 등에 동전을 가득 담아 행정센터에 두고 가고 있습니다. 이번엔 없었지만 그는 매년 상자 안에 ‘구겨지고 녹슬고 때 묻은 돈일지라도 좋은 곳에 쓸 수 있다는 의미’라는 내용의 쪽지를 함께 넣었습니다.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처음의 광택을 잃고 지저분해진 동전이지만 하나둘 모여 좋은 곳에 의미 있게 사용됐으면 하는 그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는 또 2015년 기부 당시 ‘무식한 사람이라 말도 글도 표현 못하지만 적은 돈 죄송’이라는 내용을 쪽지에 함께 적어두기도 했습니다. 2008년 기부 때에도 ‘본인은 무식한 사람’이라며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성탄절이 이틀 지난 지난달 27일 동전천사가 두고 간 동전들. 연합뉴스

많을 땐 100만원 이상의 동전을 기부해온 동전천사는 기부하고 돌아가는 길에 직원을 마주쳐도 자신의 이름을 절대 알려주지 않고 황급히 빠져나가 그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2013년 그와 마주쳤던 직원이 “흰색 점퍼 차림으로 온 이 남자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었지만 인상이 정말 좋았다”고 전한 게 전부입니다.

해운대구의 한 관계자는 “동전천사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며 “동전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이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한사코 숨기며 어려운 이웃을 위한 선행을 14년째 이어온 동전천사는 올해도 그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들의 추운 겨울을 녹여줄 것 같습니다. “좋은 곳에 써달라”는 그의 선한 마음이 주변 이웃들에게도 아낌없이 전달됐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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