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활동가, 대량살상범처럼 극단주의자”…美정부 분류 논란

국민일보

“기후활동가, 대량살상범처럼 극단주의자”…美정부 분류 논란

‘기후 활동가 투쟁’ 정의 두고 갈등 고조

입력 2020-01-14 17:37 수정 2020-01-14 18:29
기후 변화 대응 시위

미국 국토안보부(DHS)가 기후 활동가들을 대량살상 범죄를 저지른 테러리스트 등과 함께 관리가 필요한 극단주의자 명단에 올려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기후변화 문제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실질적 위기로 급부상하며 서구권 등지에서 기후 활동가들이 새로운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 힘을 얻자 이들의 투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를 두고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13일(현지시간) DHS 내부 문건을 입수해 미 행정부가 미국과 캐나다를 잇는 대형 송유관 사업에 저항하는 기후 활동가들을 백인민족주의자, 대량살상 범죄자 등과 더불어 극단주의자로 분류했다고 보도했다.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을 기치로 내건 5명의 기후 활동가들은 지난 2016년 10월 미국·캐나다 국경 4개 지역서 캐나다산 오일샌드(원유가 함유된 모래암석)에서 추출된 원유를 미국의 정유시설로 운반하는 송유관의 밸브를 잠가 체포됐다. 수시간에 걸쳐 원유 수송에 차질을 빚었고 가로막힌 원유량은 미국 하루 소비량의 15%에 달했다. 환경단체 ‘밸브 터너스(Valve Turners)’ 소속으로 알려진 이들에 대한 재판은 미래의 거대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며 기후 활동가들이 범죄 소지가 있는 행위를 저지르는 일을 어디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

환경론자들은 그간 오일샌드에서 정제한 석유는 일반 석유에 비해 사용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5~15% 더 많고, 석유를 분리하기 위해 사용되는 막대한 양의 물이 추출 과정에서 폐수로 바뀌어 심각한 수질오염을 일으킨다며 오일샌드 개발에 반대해왔다. 반면 석유산업계는 캐나다 서부 앨버타주에 매장돼 있는 양의 오일샌드를 다수의 정유시설들이 위치한 미국 텍사스주로 보내 정유 작업을 거치면 큰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고 판단, 두 나라를 잇는 총 길이 1800여㎞에 달하는 키스톤 송유관을 건설 중이다. 기후변화 대응 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스웨덴 출신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16)가 지난해 10월 앨버타주에서 열린 기후변화 대응 촉구 시위에 참여하는 등 키스톤 송유관은 기후 활동가들의 십자포화를 맞아왔다.

DHS는 지난 2014~2017년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들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움직임들에 주목했고 밸브 터너스를 ‘환경 극단주의자’로 테러 명단에 포함시켰다. 이 명단에는 백인 청년이 흑인교회에서 총기를 난사해 9명이 숨진 2015년 사우스캘로라이나주 찰스턴 교회 총기 난사 사건, 2017년 버지니아주 샬롯츠빌에서 발생한 백인우월주의 유혈사태가 함께 포함됐다. 해당 문건에는 ‘인종 및 환경 이데올로기’가 미 국내 테러의 주요 원인이라고 명시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DHS가 기후 활동가들을 극단주의자로 선정한 것은 과도한 조치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이었던 마이크 게르만은 “기후 활동가들이 테러에 대한 법률적 정의를 충족시킬 만한 치명적인 폭력의 유형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며 대량살상이란 결과에 책임이 있는 백인우월주의자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명단에 이름을 올린 기후 활동가 샘 재섭은 “미 정부가 결국 화석연료 산업의 미래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뿐만이 아니다. 기후 활동가들의 행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영국도 갈등을 빚고 있다. 미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영국 대테러 경찰은 최근 발간한 소책자에서 기후변화 대응 운동 단체인 ‘멸종 저항’과 동물보호단체 등을 백인우월주의자, 이슬람 근본주의자, 네오나치 세력과 한데 묶어 ‘급진주의 위협 세력’으로 분류했다가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이를 번복하고 책자를 회수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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