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뱃속서 일본에 뺏긴 아버지… 어떻게 분리수거하듯 버리나”

국민일보

“엄마 뱃속서 일본에 뺏긴 아버지… 어떻게 분리수거하듯 버리나”

한반도 출신자 유골도 소각했나 묻자, 日 “모른다”

입력 2020-01-22 00:20
일제 강점기에 동원돼 전사한 아버지의 유골을 찾기 위해 21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본 후생노동성과 외무성 당국자를 만난 박남순(77) 씨가 부친의 동원 및 사망 기록 등이 담긴 '해군 군속 신상 조사표'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태평양 섬 이토오(硫黃島)에서 발굴한 유골을 대량 소각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토오는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 출신자 다수가 강제 동원돼 목숨을 잃은 곳이다.

일본 후생노동성 당국자는 21일 한·일 시민단체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토오에서 전사자 유골 약 1만위(位)를 수습했으며, 여기에서 513개의 검체를 채취한 뒤 대부분 소각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파악한 이오토 전사자는 2만1900명이다. 이중 절반 정도를 발굴해 검체 채취와 소각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전사자 중 절반의 유골은 유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다.

“한반도 출신자 유골도 소각했나” 묻자 ‘모르쇠’

양국 시민단체는 이같은 유골 처리 방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 표했다.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일본 시민단체 ‘가마후야’ 대표는 “유족이 소각을 허락한 것도 아니다”라며 “검체를 채취했다 하더라도 DNA 감정이 제대로 안 되면 다시 재취해야 하는데, 유골을 소각해 신원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전몰자 유골을 가족 곁으로' 연락회, 가마후야 등 한일 양국 시민단체와 일본 후생노동성·외무성 당국자가 12일 일본 중의원 제2의원회관에서 유골 문제에 관해 협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소각된 유골 중 한반도 출신자도 포함됐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문제로 제기됐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등에 따르면 전쟁 중 이오토에 동원돼 목숨을 잃은 한반도 출신자는 170명이다. 이는 일본 현대사 연구자인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가 작성한 ‘전시(戰時) 조선인 강제노동 조사자료집-연행처 일람·전국지도·사망자 명부’(다케우치 명부)에서 확인되는 수치다.

그러나 후생성 당국자는 “이오토 전사자 중 한반도 출신자의 숫자는 파악하지 않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각된 유골에 한반도 출신자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모른다”는 대답을 되풀이하기도 했다. 보추협 측은 다케우치 명부와 후생성이 확보한 명부 등을 언급하며 “한반도 출신 사망자 규모를 알 방법은 많다. 성의의 문제”라고 비판했다.

빈틈 지적에도… “유품보고 추정하겠다” 황당 답변

시민단체들은 “일본 외 지역에서 발굴한 유골도 소각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에 후생성 당국자는 “일본인일 개연성이 확실하게 높은 것을 제외하고는 소각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DNA 감정 전 유품 등을 토대로 일본인인지 아닌지를 추정해 소각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에 동원돼 전사한 조선인 등의 유골 문제와 관련해 21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 후생노동성과 외무성 당국자를 만난 일본 시민단체 '가마후야' 대표인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 씨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자 시민단체 측에서는 “DNA 검사 없이 유골을 육안으로 보고 일본인일 개연성을 판단한다는 발상 자체가 유골 발굴 현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발상”이라며 공분했다. 전시 유골은 출신지나 국정을 추정할 유품이 남아있는 경우가 적다. 따라서 임의 판단 후 소각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발굴 및 유골 감정을 추진 중 대학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시스템을 개선할 것을 촉구했다. 과학적인 전문가가 아닌 공무원들이 유골 중 일부를 임의로 골라내는 처리 방법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요구에도 후생성 측은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유골을 ‘분리수거’ 하듯이…” 눈물 흘린 유족

“적절하게 대응하겠다” “답변을 삼가고 싶다” 등 일본 당국 관계자들의 두루뭉술한 답변에 눈물을 쏟은 건 유족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돼 타국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유골을 찾고자 도쿄(東京)로 건너온 박남순(77)씨도 이중 한 명이다.

박씨의 부친 박만수(1920년생)씨의 동원과 사망에 관한 정보는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일본 정부의 ‘해군 군속 신상조사표’에 담겨있다. 여기에는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에 고인을 합사했음을 알리는 도장까지 찍혀 있다.

박씨는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합사 취소를 요구하는 법정 투쟁을 벌이는 등 유골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그는 이날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를 일본 사람들에게 빼앗겼다”며 “뼈 한쪽이라도 찾아내 화장할 수 있게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희생자 유족인 이희자(77) 보추협 공동대표 역시 “일본 당국자들의 이런 태도는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이라며 “숨이 막힌다”고 했다. 이어 “전문 지식을 가진 법의학자가 해야 할 일을 후생성 직원들이 분리수거하듯 처리하고 있다”며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수십년 전 전쟁터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뼛조각이 하찮을지 모르지만 유족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며 “한 조각이라도 가족의 품으로 돌려받기 위해 기다린다”고 강조했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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