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외지인 들어와 그림 그리고 헛짓…을지로 엉망진창됐다”

국민일보

[르포] “외지인 들어와 그림 그리고 헛짓…을지로 엉망진창됐다”

힙지로 열풍에 밀려나는 인쇄·조명 전문상가…건물주 배불리고 엉뚱하게 예술가들 비난 받아

입력 2020-02-23 04:30 수정 2020-02-23 04:30
을지로 일대 전경. 사진 김정재

“젊은 XX들이 들어와서 을지로가 휘청인다. 단결하여 몰아내자!”

서울 을지로에 작업실을 얻어 일러스트 작업을 해온 박찬일(가명·31)씨는 최근 작업실 문 사이에 꽂힌 편지를 발견했다. 비에 젖어 군데군데 문장이 지워지긴 했지만 분명 골목에 새로 입주한 예술가들과 젊은 상인들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힙지로(힙+을지로) 열풍에 임대료가 오르면서 상인들의 눈빛이 곱지 않다는 것은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욕설이 담긴 편지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겨울이 막바지로 향하는 2월초 ‘감각의 제국’ ‘을지맥옥’ 등 을지로 핫플레이스가 모여있는 3가 골목 곳곳에는 묘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자재를 나르는 지게차들은 맛집 앞에 줄을 선 관광객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갔고, 그 위로 클랙슨 소리와 고성이 오갔다.

인쇄골목의 터줏대감 ‘상현제본’ 유리창에는 ‘참는 것도 한계를 다했다’는 공고문이 붙어있었다. 술집과 밥집을 찾은 관광객들이 버린 담배꽁초에 가게 앞 화분은 매일 아침 ‘담배 선인장’이 됐다. 사장 최상훈(63)씨는 “음식점이니 예술가들이니 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동네가 엉망진창이 됐다”고 혀를 끌끌 찼다.

레트로 열풍의 중심 힙지로의 숨겨진 이면이었다.
‘상현제본’ 유리창에 붙어있는 경고 메시지. 사진 소설희 인턴기자

“을지로가 떴지 우리 가게가 떴나요”

인쇄업, 철강, 조명 등 을지로에서 오랫동안 전문상가를 운영해온 상인들은 힙지로 열풍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인터뷰에 응한 17명의 상인 중 16명은 “동네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생활이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가장 큰 건 임대료 상승이었다. 을지로에서 10년 넘게 제본가게를 운영해온 최씨는 “2년 전 약 1억원 정도를 세무서에 신고했는데 작년에는 약 3000만원밖에 하지 못 했다. 일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그런데도 임대료는 20~30% 정도 올랐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나도 누군가 권리금 3000만원 준다고 해서 나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1년만 더 해보자’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다 ”고 토로했다.

광고업 종사자 권모(52)씨 역시 “원래 임대료가 250만원이었는데 작년에만 50만원 올랐다”며 “15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비슷한 사정으로 인해 동료들도 장사를 많이 접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세운상가부터 을지로3가까지 이어지는 전문상가 거리에서는 닫힌 셔터 위에 붙은 ‘임대 문의’ 안내문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을지로 일대 곳곳에 붙은 임대 문의 안내문. 사진 박실 김현경 인턴기자

임대료는 오르고 매출은 떨어지는 건 힙지로 열풍으로 을지로를 찾기 시작한 사람들이 을지로 전통 산업의 실 구매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을지로 일대는 3가와 4가, 세운상가 등을 중심으로 철공·조명·타일·인쇄·전자기기 등 상권이 위치해 있다. 그러나 최근 을지로를 찾는 이들은 ‘힙’한 분위기의 카페와 음식점을 찾는 관광객이지, 볼트와 너트를 사러 오는 제조업자가 아니었다.

박모(음향가게 운영·경력 35년)씨는 “손님인줄 알고 나가봤더니 젊은 커플이 팔짱끼고 가게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며 “이런 손님이 열에 아홉이다. 구경꾼들 때문에 오히려 장사만 더 망치고 있다”고 분개했다. 그러면서 “보니까 상가 리모델링이니, 예술가와 협업이니 뭘하긴 하던데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도대체 누굴 위한 사업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SNS에서 인기가 높은 한 카페가 위치한 서울 중구 대림상가 3층 보행로. 사진 이홍근 인턴기자

구경거리가 됐다는 자괴감도 컸다. 김모(금박업·경력 30년)씨도 “원래 여기는 프라이드 강한 상인들이 몰려있는 곳이었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장인”이라며 “지금은 그저 재미있는 볼거리로 전락한 기분”이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세운상가에 위치한 전자상가 주인 윤모씨는 “이질적인 상권이 빈자리를 채워나가면서 을지로 일대의 전문상가 이미지가 퇴색되고 있다”면서 “먹자골목처럼 되어버리면 누가 부품을 사러 여기까지 오겠냐”고 반문했다.

“을지로 장인들이 볼거리 전락한 기분”

비난의 화살은 거리를 띄운 예술가들과 젊은 상인들에게 날아들었다. 최근 을지로 대표 핫플레이스로 꼽힌 카페 옆에서 조명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모씨는 “솔직히 말해서 외지인들 다 내쫒고 싶은 심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괜히 들어와서 동네에 그림 그리고 헛짓하는 바람에 관광객들만 몰려든다”며 “차라리 예전이 낫다. 지금이 IMF보다 2배는 어렵다”고 한탄했다.

이씨의 주장에 따르면 문제가 발생한 건 2015년 무렵. 을지로 도심 재생이 진행되면서 동네에 예술가와 젊은 사업가들이 들어왔고 이 때부터 동네가 관광지로 전락했다.

정부 사업을 들여다보면 힙지로 열풍이 시작된 2015년 전후로 예술가와 상인들이 유입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구청은 2015년 ‘을지로 디자인 예술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버려진 공간을 예술가들에게 지원했다. 을지로에 자리를 잡은 예술가들은 후미진 뒷골목의 담벼락과 셔터에 그림을 그리고 야외 갤러리를 만드는 등 지역 기반 작업을 도맡았다.
을지로 철공소 전경. 사진 김정재

이들 덕에 을지로는 낙후된 슬럼가에서 ‘공장지대 속 힙한’ 공간으로 탈바꿈했고, 카페와 음식점 창업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여기에 2014년 ‘다시 세운’과 같은 서울시의 청년 창업 지원사업까지 더해졌다. 예술가들이 지핀 힙지로의 불씨가 정부 지원과 청년 사업가라는 바람을 만나며 산불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을지로는 일평균 유동인구 6만2000명에 달하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을지로 3가 일대에서 25년간 조명가게를 운영해온 한모씨 역시 예술가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다. 그는 “매번 지역 상생을 해야 한다고 이것저것 하긴 하지만 사실은 피해만 주고 있다”며 “취지는 좋지만 달갑지는 않다”고 했다.

최모(인쇄업·경력 28년)씨 역시 “예술가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젊은이들이 거의 다 죽어가는 곳 살려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걸 보면서 짠했다”며 “하지만 그들이 을지로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부터 임대료가 오르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알면서도 원망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을지로 4가역 인근 골목. 사진 김정재

“상인들을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좀 씁쓸하긴 하네요”

을지로를 띄우려 노력해온 예술가들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모(40)씨는 “우리가 도시재생 작업을 하는 게 궁극적으로 좋은 방향인지 의문이 든다”며 “국가에서 하는 사업들이 소외된 자를 위해서 한다고 하는데 결국 건물주 배만 불려 줬다는 생각에 자학하게 됐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이씨는 “예술가들이 을지로를 위해 아무리 일해도 칭찬은커녕 욕만 더 듣는 것 같다”며 “임대료를 올리는 건물주들은 정작 빠지고 괜히 예술가들에게만 비난이 쏠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예술가도, 상인도 가진 것이 없어 을지로에 모여들었는데 진짜 갑은 제쳐둔 채 을과 을이 서로를 비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을지로 일대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류모(28)씨도 같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동네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을지로의 모습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다”면서 “그런데 내 작업이 큰 맥락으로 보면 을지로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기는커녕 가속화시키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애초에 우리가 애쓴다고 막을 수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변화를 받아들이되 전통적 산업과 새로운 상권의 공생은 불가능할까. 전문가들조차 비관적인 입장이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도심지가 도시정비 사업으로 인해 거시적인 차원에서 상권을 변화시키며 지역 활성화를 가져오고 있지만 새로운 산업이 들어오는 만큼 기존 상권을 육성시키거나 활성화시키는덴 역부족”이라고 평가했다.

을지로 거리를 걷는 행인. 뉴시스

조명가게 김모씨는 공허한 표정으로 왁자지껄한 을지로 거리를 바라봤다. 적막한 가게 내부 분위기와는 달리 거리의 사람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밝은 표정이다. 30년 가까이 을지로 일대에서 장사를 해온 김씨는 급변한 분위기가 여전히 낯설다.

김씨는 최근 월세가 오를지도 모른다는 통보를 받았다. 조명 판매량도 저조해 곧 가게를 비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당장 장사를 접을 순 없다. 김씨는 옆 점포에서 나부끼는 임대 안내 종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부가 딱히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가 다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30년 간 이 일만 해왔는데 그냥 하던 일 최선을 다 해서 하는 수밖에 없죠, 뭐.”

이홍근 인턴기자, 소설희 인턴기자, 박실 인턴기자, 김영철 인턴기자, 최희수 인턴기자, 김현경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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