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충격’ 고백하는 20대 남성들 “저도 가해자더라고요”

국민일보

‘n번방 충격’ 고백하는 20대 남성들 “저도 가해자더라고요”

SNS 중심으로 반성 물결…6명 남성들이 털어놓은 이야기

입력 2020-03-25 00:30 수정 2020-03-25 00:30
기사와 관련 없는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n번방 사건 이후로 야동 보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집니다”

24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후로 죄책감이 들어 소위 ‘음란 게시물’을 못 보겠다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게시자는 “야동 사이트만 들어가도 한국인 영상, 딥페이크 영상이 보인다”며 “전에 그런 것들을 본 것에 대해 죄책감이 크게 느껴진다. 내가 본 영상도 그렇게(n번방처럼)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해당 게시물은 300개가 넘는 좋아요를 받았다. ‘나도 그렇다’는 댓글도 줄줄이 달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야한 게시물’이 ‘개념 게시물’로 통하고 야동 품번을 추천한다는 글이 인기 순위에 랭크되던 게시판 분위기가 확연히 바뀐 것이다.

이런 죄책감과 각성의 분위기는 SNS에서도 확연히 나타났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는 리벤지 포르노 시청 사실을 밝히며 용서를 구하는 글이 올라오고, 남성들이 나서서 n번방 가입자 신상공개를 촉구하기도 했다. n번방 규탄을 넘어 그동안 별다른 생각 없이 보던 ‘야동’의 진짜 의미를 깨닫고 소비를 근절하자는 적극적인 반성과 실천 논의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성들은 n번방 사건을 보며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20대 남성 6명에게 익명으로 물어봤다.

커뮤니티 캡처

포르노와 불법촬영물, 구분도 못했다

인터뷰에 응한 6명의 남성 모두 처음 불법촬영물을 접한 시기는 학창시절이라고 답했다. 접근 방법은 ‘p2p 사이트’를 통한 다운로드였다.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프루나’나 ‘파일노리’와 같은 p2p사이트가 성행했고 이 사이트에는 음란물이 가득했다. 사이버 머니를 충전한 뒤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다른 사용자가 올린 동영상을 내려받는 시스템이었다.

p2p 사이트에는 불법으로 촬영·유출된 동영상과 해외 포르노가 구분 없이 업로드돼 있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A씨(25)는 “한국에서 촬영된 불법촬영물이 ‘국산’이라는 이름으로 p2p사이트에 올라와 인기를 끌었다”면서 “불법 촬영물인지, 기획 촬영물인지 구분 자체가 없었다. 애초에 리벤지 포르노라는 개념 자체도 없었다”고 말했다.

가장 처음 접한 야한 영상이 리벤지 포르노인 남성들도 많았다. 대학생 B씨(25)는 “‘국산 야동 신작’을 구하면 같이 돌려봤다. 주위에 보면 친구가 가져온 영상으로 처음 야동을 본 남성들이 많다”며 “불법 촬영물을 첫 음란물로 접하다 보니 이것이 불법이며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대학원에서 조교로 일하고 있는 C씨(25)는 “서양 야동과 일본 야동보다 ‘국산 야동’이 더 리얼하다고만 생각했지 동영상에 나오는 여성이 어떤 피해를 볼지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보는 것’은 가해가 아니라 생각했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성인이 된 뒤에도 이런 분위기는 이어졌다. 카카오톡 단체방을 통해 새로운 불법촬영물을 공유하는가 하면, 구하기 어려운 ‘자료’를 공유하면 영웅 취급을 받기도 했다. C씨는 “당시에는 동영상에 나오는 여성이 유출의 피해자라고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한 것”이라며 “여성들 역시 동의하거나 금전적인 보상 등의 대가를 받고 촬영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불법촬영물, 리벤지 포르노에 대한 공론화가 시작되었을 때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학생 D씨(24)는 “영상을 찍어서 유포한 사람들에 대해 함께 욕했다”면서도 “내가 영상을 찍은 게 아니다 보니 보는 것에는 별 죄책감이 없었다”고 말했다. 언론 보도나 비판의 방향이 불법촬영물의 생산자에게 집중되다 보니 불법촬영물을 ‘보는 것’에는 죄책감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D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상하게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고 덧붙였다.

불법촬영으로 피해를 봤다며 공론화에 불을 지핀 유튜버 양예원씨. 뉴시스

n번방, 피해자에게 감정이입하게 하다

그러나 n번방은 달랐다. n번방 피해자들을 고문한 건 ‘박사’만이 아니라 26만명의 남성 가입자였다. 가입자들은 적극적으로 피해자들에게 가학적인 행동을 할 것을 요구했다. 가입자들은 방관자가 아닌 적극적 가해자였다. 이에 26만명 모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동영상을 보는 것도 가해라는 생각은 남성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인터뷰에 응한 남성들은 “n번방 내용이 너무 끔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피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됐다”며 “생각해보니 리벤지 포르노도 별다를 게 없더라. 유출 피해자는 얼마나 끔찍한 삶을 살고 있을까 처음으로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본다는 행위가 어떻게 가해의 연쇄고리를 만들어냈는지, 그 고리의 끝에서 피해 여성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n번방이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n번방 대화 내용. 국민일보 DB

피해자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나니 쾌락의 무대였던 포르노 사이트는 절규가 가득한 지옥으로 변했다. B씨는 “불법촬영물을 보고 즐거워 한 나도 일정 부분 가해자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며 “사실상 내가 온라인으로 강간을 해 온 것과 마찬가지라고 느껴져 너무 힘들다”고 고백했다.

B씨는 죄책감에 인스타그램에서 이어진 청와대 국민청원 동참 릴레이에도 참여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26만명이면 남성 100명 중 한 명이다. 1%가 n번방을 봤다는 소리”라면서 “n번방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성이 ‘국산 야동’을 한 번씩 봤을 텐데 이제 와서야 n번방 가입자를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내는 게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피해를 온전히 겪은 여성들이 보면 얼마나 기가 차겠느냐”고 덧붙였다.

A씨는 n번방 사건 이후로 리벤지 포르노와 딥페이크 영상 일체를 소비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한국 여성이 나오는 썸네일만 봐도 n번방 피해자들이 연상된다”며 “너무 찝찝해서 절대 누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는 E씨(26) 역시 “혹시나 이 동영상에 나오는 여성이 유출 피해자면 어쩌나 싶다”면서 “범죄 행위에 동참할 수 없다는 생각에 더는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처벌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A씨는 “요즘 대부분의 사람은 포르노 사이트에서 스트리밍으로 야동을 본다. 익명의 게시자들이 영상을 업로드하기 때문에 영상의 출처를 알 수 없다”면서 “내가 누른 영상이 n번방 영상이 아니라는 확신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처벌받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텔레그램 '박사방'을 운영한 조주빈(25)이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서울 종로경찰서 유치장으로 들어가고있다. 연합뉴스

“잘 몰라서 죄의식도 못 느꼈습니다”

왜 남성들은 n번방 이전에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을까. 인터뷰 참여자들은 “몰랐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남성이 성장 과정에서 받는 성교육은 지극히 ‘남성 중심’이기 때문에 여성의 입장에서 ‘야동 시청 문화’를 성찰해 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불법촬영물을 보지 말라는 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보는 남성들에게 나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배운다는 거였다. 피해자 여성의 입장을 교육받지는 못했다고 했다.

A씨는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을 때 음란물을 보지 말라는 얘기를 듣긴 했다”면서도 “뼈가 삭을 수 있기 때문이라거나 자극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성관계가 힘들어질 수 있다는 식의 이유를 들었다”고 말했다. D씨 역시 “선생님이 야동을 보는 건 당연하나 자극적인 내용만 피하라고 말씀하셨다”면서 “리벤지포르노, 불법촬영에 대해서 강조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D씨는 “여성단체 등 외부 강사들이 진행하는 ‘성폭력 방지’ 교육 시간이 있기는 했지만 참여도가 낮아 그냥 자는 시간으로 인식되기 일쑤였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가정에서의 성교육 역시 마찬가지였다. B씨는 “워낙 성에 대해 쉬쉬하다 보니 이런 내용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면서 “들어본 거라고는 아이가 생길 수 있으니 피임 잘하라는 얘기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반성의 기회 준 n번방 사건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n번방 사건이 남성들에게 반성이나 자기 위치성을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면 다행”이라면서 “어떻게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게 중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송 사무처장은 “버닝썬, 정준영 동영상도 n번방과 비슷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기대한 만큼의 처벌도 없었고 각성의 흐름도 보이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이번 n번방은 ‘모두가 공범이다’라는 메시지를 남성들에게 던져 이런 움직임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부처 등이 연일 강경하게 처벌하겠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것도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송 사무처장은 “한국 불법촬영물 대신 일본이나 서양에서 제작된 기획 포르노를 보자는 식의 흐름은 위험하다”면서 “어떻게 하면 실생활에서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을 것인가를 지속해서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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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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