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금융위기 다 버텼는데…” 현실 된 코로나 해고 [이슈&탐사]

국민일보

“IMF, 금융위기 다 버텼는데…” 현실 된 코로나 해고 [이슈&탐사]

제조업에서 시작된 코로나 실직

입력 2020-03-25 10:40 수정 2020-03-25 15:25
인천 남동공단의 한 제조업체의 내부 모습. 올해 신규 수주 물량이 크게 줄어들면서 당장 다음 달부터 회사 경영 상황이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사장은 이달 초 경영 혁신 계획을 발표했다. 비상경영을 선언하며 비용을 줄이는 대목에서 권고사직을 언급했다. 깜짝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음산한 기운은 전염병이 창궐하던 지난달부터 회사를 감돌았다. 직원들은 수주가 끊겨 물건을 더 만들 이유가 없어졌다는 걸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

“잠깐 올라오시죠.” 사장은 3월 초부터 전 직원을 대상으로 개별 면담에 들어갔다. 전화벨이 울리면 직원은 작업을 멈추고 죽는 상을 하고 계단을 올랐다. 곧 소문이 돌았다. “○○씨 이번에 나간대.” 무거운 침묵이 공장을 짓눌렀다.

전염병이 실물경제로 전이되는 속도는 가팔랐다. 내수 절벽 상황에서 해외 수주 업무까지 막히며 일감이 떨어진 제조업체에선 해고 칼바람이 불고 있다. 사장도 직원도 해결책이 안 보인다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지난 23일 찾아간 인천 남동공단 제조업체들 상황이다.

외환위기, 금융위기 다 버틴 강소기업도 결국 감원
이준혁(가명·50)씨는 날벼락을 맞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지난 18일 사장 면담 때 “미안하지만 이번 달까지만 일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파도는 어떻게든 헤쳐 나갔는데 이번 건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되네요. 지난해 12월 중국서 발현된 바이러스가 3월 제 책상을 사라지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올해 쉰이 된 이씨는 한국 경제의 부침을 온몸으로 겪었다. 서울의 한 사립대 무역학과를 나와 대기업에서 해외 영업 일을 했는데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회사는 구조조정을 시작했고, 그는 다른 업체로 옮겼다. 같은 일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반복됐다. 돌고 돌아 자리 잡은 게 지금 회사인데 감염병 대유행이 기어코 다시 그의 삶을 짓눌렀다.

“집사람한테는 아직 얘기 못 했어요. 뽑는 회사도 없고, 이제 오십인 제가 재취업이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이씨가 있던 부서는 아예 정리됐다. 다른 부서까지 포함해 이번 달에만 10명이 권고사직 처리된다. 그 중 한 명인 입사 20년 차 김태현(가명·45)씨는 “인원 감축 분위기가 돌면서 저한테까지 칼날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 생존한다고 해도 어차피 1~2년 안에는 정리가 되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퇴사 결정 뒤 마지막 회식 자리에서 팀원들 모두 펑펑 울었다고 했다. 김씨는 “저희만 그런 게 아니라 이쪽 업체들 다 그렇다”며 “사장도 불쌍한 게, 어떻게 한순간에 사업이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인천 남동공단 제조업체들이 몰려있는 건물 내부 모습.

그들을 자를 수 밖에 없었던 사장 최민재(가명·58)씨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한 명씩 붙잡고 미안하다고 얘기하면서 눈물로 사직을 권고했어요. 안 그러면 도저히 안 될 거 같아서…. 대학교까지 학자금 지원해서 애들을 다 키운 분들인데 저도 속이 아주 쓰리죠.”

최씨는 1999년 1월 회사를 인수해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파고를 다 겪으면서도 여태 직원을 한 번도 줄여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2~3년 전에는 고용노동부 청년친화강소기업, 인천시 일자리창출우수기업 인증까지 받았다.

“금융위기 때는 회사 매출액이 절반으로 떨어졌는데, 직원들을 절반씩 교대로 쉬게 하며 버텼어요. 직원들 다 끌고 안고 갔습니다. 그때는 1년만 버티면 되겠다 싶었는데 이번 건은 대책이 안 나오네요.”

제조업 상황은 수년째 내리막이었다. 침체 속도는 2~3년 전부터 눈에 띄게 가팔랐는데 그런 와중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직격타를 날렸다고 했다. 매년 20% 가까이 감소하던 수주는 코로나19 사태 이후엔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최씨는 “줄어든 게 아니라 아예 없는 수준”이라고 표현했다. 사태가 단기간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내놓은 답이 인원 감축이다.

한계에 왔다
“매출을 기대하지 못하니까 어떻게 버티느냐 싸움이 됐어요. 허리띠 졸라매기인데, 그게 결국 사람 정리하는 거라….”

대구 달서구 성서공단 모습. 곳곳에 '공장 임대'를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시스

벼랑 끝 사투를 벌이는 인천 남동공단 제조업체 여러 곳이 이미 해고를 시작했다. 휴대전화 부품 생산 업체를 운영하는 박기준(가명·55)씨는 아예 회사를 멈출 생각까지 하고 있다. 지난 1월부터 신규 주문 내역이 없어졌다. 아예 일이 없다고 했다. 한 달 대출 이자만 5000만원, 직원 급여까지 운영비는 2억원이 든다. 공장을 돌리지 않고 버티기만 하는 데 드는 최소 비용이다.

박씨 업체는 3차 벤더인데 그에게 일감을 주는 2차 벤더 업체도 상황이 마찬가지다. 거래처 사장들과 “우리도 일감이 없어 내려줄 게 없다”는 하소연을 나눈다. 박씨는 “버틸 수 있는 능력이 한계치에 온 것 같다. 직원들도 불안해한다. 한두 달 더 이러면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며 “코로나19 영향이 언제 끝날지 몰라 대책도 못 세우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박씨는 종이컵을 구겨댔다.

포장기계 제조업체도 구조조정을 고려하고 있다. 지난달 중순부터 대기업들의 신규 설비 투자가 미뤄지면서 내수거래가 급감해서다. 전염병 공포에 베트남도 문을 닫아 수출 수입도 끊겼다. 업체 관계자는 “수주가 지금보다 30% 이상 줄면 결국 직원들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4, 5월 위기설
“앞으로 두세 달 더 이런 상태라면 공장을 돌릴 물량이 없어요. 살얼음판 걷는 기분이에요.”

대구에서 기계분야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대표 김용호(가명·65)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90년대 창업한 작은 업체는 20여년 만에 직원이 약 300명인 내실 있는 중소기업으로 자랐다. 수출을 잘한다고 각종 부처와 협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전 세계 20여 개국에 기계를 수출해 수백억원의 매출을 기록할 정도였다.

하지만 수십 년을 버텨온 강소기업도 코로나 발(發) 충격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수출기업’의 목표가 올가미가 됐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 봉쇄령이 내리자 김씨의 업체는 옴짝달싹할 수 없어졌다. 매출 비중의 80%가 수출인데, 수주를 받으러 해외로 나가는 길이 모두 막혔다. 기계를 만드는데 필요한 부품을 수입해오던 나라들도 모두 문을 닫았다. 미리 받아뒀던 주문은 5~6월이면 끝이다. 이미 김씨는 업체의 직원들의 잔업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잔업으로 벌던 수당을 고려하면 직원들 월급은 20~30% 정도 깎였다.

한 제조업체 대표가 공장에 쌓여있는 재고를 보여주고 있다.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아요. IMF 위기 때는 해외공장이 멈추진 않았거든요. 미국이나 중국도 다 괜찮았고. 금융위기 때도 일감이 줄어서 물량이 1년 정도 많이 줄었던 기억은 나는데 제조업 ‘셧다운’까진 아니었어요.”

김씨 업체만의 상황이 아니다. 국민일보가 접촉한 지역 곳곳의 산업단지 내 업체들은 비슷한 우려를 쏟아냈다. “원청이 멈춰버리니까 오더도 없고, 출고도 없는 상황”(대구 성서산업단지관리공단 관계자)이라는 것이다. 울산의 조선해양기자재업계 관계자는 “큰 기업이면 워크아웃 같은 제도적 지원이라도 받지만 중소기업은 그 정도 상황을 맞으면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필연적으로 해외시장과 원청의 영향을 많이 받는 자동차산업도 주춧돌 역할을 하던 작은 기업부터 타격을 입고 있다. 광주의 한 자동차부품 공장의 경우 1월부터 수주 활동을 멈췄다. 이 공장을 운영하는 신모씨는 “우리는 수주를 받으면 그걸로 몇 개월, 몇 년을 돌리는 구조다. 지금 당장은 예전에 받아둔 수주를 돌리긴 하니까 어떻게 버티는데 앞으로 공장에 투입될 물량이 없어지면 문제가 커진다”고 했다. 유럽에서 거세지는 코로나19 확산세도 우려를 키운다. 울산의 한 산업단지관리공단 관계자는 “유럽에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들의 경우 걱정이 더 크다. (국가 간 교류가 멈추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연합(EU)이 수출 자체를 막아버리게 되면 큰일이 난다. 매출의 60%를 그쪽에 의존하는 업체도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발(發) 경제 충격에 소규모 기업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진단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대기업이야 외환보유량이 어느 정도 받쳐주기 때문에 위기가 터져도 웬만큼 버틸 수 있지만, 밑에 부품 대는 중소기업은 당장 생산을 줄이면 매출이 끊기고 돈줄이 막힌다”고 경고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도 “수출이 줄고 내수가 침체하면 대기업이야 버티겠지만 중소기업은 어려워진다”며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유동성이 부족한 중소기업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전웅빈 김판 임주언 박세원 기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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