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내 피해물 봤다고 했다” 끔찍했던 n차 유포 탈출기

국민일보

“지인이 내 피해물 봤다고 했다” 끔찍했던 n차 유포 탈출기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인터뷰

입력 2020-04-01 00:48 수정 2020-04-01 14:12
게티이미지뱅크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게 시간은 독이다. 불법촬영물을 찾아내 지우는 건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았다. 너무 빨리 퍼지고 너무 많이 퍼졌다. 찾아내 지워도 또 올라왔다. 끝은 보이지 않았다. 불법촬영물 피해자인 20대 초반 여성 이수연(가명)씨는 “도망치고 싶었고 지금도 도망치는 꿈을 꾼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이씨는 지난 28일 국민일보와 만나 “많은 피해자들이 숨어서 고통받고 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며 “무엇보다 ‘박사방’ 사건 수사로 디지털 성범죄 대책을 만들어가는 초기 국면에 내 피해 경험이 도움이 됐으면 한다. 인터뷰를 앞두고 며칠간 잠도 못 잤지만 꼭 나서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지금도 이씨는 2주마다 포털, SNS, 커뮤니티를 구석구석 모니터링한다. 본인이 등장하는 피해물을 주기적으로 검색해서 경찰에 넘기는 일을 무한반복하고 있다. 이씨로부터 디지털 범죄에 맞선, “혼자서는 절대 이겨낼 수 없었을” 고통스러웠던 지난 9개월의 이야기를 들었다.

-피해 상황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지난해 7월 지인이 내가 나오는 불법촬영물을 봤다고 알려줬다. 가입자가 소수인 불법촬영물 사이트였다. 조회 수가 벌써 1000회를 넘었는데 내가 틀림없었다. 검색을 통해 최초 유포범이 지난해 1~5월까지 1차 유포한 것을 확인했다. 지인은 게시자를 신고하자고 계속 격려했다. 그는 다른 피해자를 도와 가해자를 고소한 경험이 있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신고를 못 했을지도 모른다. 급한대로 휴대전화로 이미지와 게시물 주소를 캡처해서 다음날 경찰서로 찾아갔다.”

게티이미지뱅크

-최초 유포자를 어떻게 특정했나

“이미지 속성을 클릭하니 촬영일시와 기종, 촬영장소가 나왔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추적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신고 당시 경찰로부터 충분한 도움을 받았는지

“증거를 훼손하게 될까 싶어 게시물을 그대로 둔 채 경찰서를 찾았다. 조사 받는 내내 초조했다. 이 순간에도 내 피해물은 계속 유포될 테니. 사실 경찰 수사는 느리고 답답했다. 8개월 동안 수사 관련 연락을 3번 밖에 못 받았다. 지난해 7월에 고소했는데 수사관으로부터 처음으로 연락 온 것이 그해 10월이다. 피해자인 내가 2주마다 n차 유포물들을 모니터링했고, 그 결과를 수사관 개인 메신저로 보냈다. ‘잘했다, 수고했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수사관의 바쁜 상황을 알고 있지만 초조했다.”

-그 사이에도 피해물은 계속 유포됐을텐데

“수사 도중에 디지털 장의사와 전화상담을 했다. 그 사람이 ‘내게 맡기면 매달 200만원 넘게 든다’면서 디지털 삭제를 무료로 해주는 시민단체인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를 소개해줬다. 4일 뒤 최초 유포자에 의한 또 다른 피해자가 여럿 확인됐고 그때서야 수사관으로부터 ‘게시물을 삭제해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개인이든 수사기관이든 불법촬영물을 삭제하려면 해외 사이트 운영자에게 직접 요청해야 한다. 내 피해물이 유포된 사이트는 2개였고, 운영자의 IP 국적은 파나마와 투발루였다. 두 곳에 삭제를 요청하는 글을 남겼다. 한군데는 나의 IP를 차단하고 회원 탈퇴 조치를 했다. 두 번째 사이트는 ‘우리는 회원이 올린 소중한 정보를 지우지 않는다. 굳이 삭제를 원하면 당신 셀카를 찍어서 인증하라. 그게 싫다면 언론에 터뜨리든 경찰에 고소하든 마음대로 하라’는 답글을 달았다.”

-n차 유포의 피해는 얼마나 심각한가

“가장 두려운 상황이 있다. 친구나 동창, 최악으로는 가족마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알아버렸다. 그 선이 깨지는 순간 엄청 힘들었다. 밤잠을 못잤다. 지난해 11월에 아는 오빠로부터 연락이 왔다. 계속 뜸을 들이더니 불법 토토사이트에서 네 피해물을 봤다고 말해줬다. 고맙다고 답한 뒤 게시물을 신고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첫 유포자 이후 8개월 만에, 20번 넘게 추가 유포됐다. 조회 수 2만건이 넘는 게시물도 있었다. 이것도 종합해서 수사 의뢰했다.”

-시민단체가 도움이 됐나

“상담사를 만나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피해자는 여성단체와 꼭 함께해야 한다. 혼자서는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전혀 알 수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서울시 지지동반자(나무여성인권상담소 지지동반팀)의 도움으로 전문 상담사와 일대일로 연결됐다. 전담 상담사가 수사·상담·변호사 자문에 매번 도움을 줬다. 수사관이 추천해준 시민단체, 특히 여성의전화도 큰 도움이 됐다. 상담사의 안내로 의료비 지원프로그램에 신청했고, 심리상담비를 지원받았다.”


-디지털 피해를 수습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피해물을 스스로 모니터링하는 작업이 제일 괴롭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았으나, 피해자 스스로 채증하는 것보다 진행속도가 느린 것 같다. 그래서 직접 했다. 구글에 내 이름·얼굴 사진을 검색해 유포물을 찾는다. 특정 사이트가 발견되면 거기 들어가서 다시 내 이름을 검색해보는 방식이다. 대개 1시간~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처음에는 3일에 한 번씩 검색했다. 그러다 2주에 한번, 너무 힘들면 한달에 한번 검색했다. 피해물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 자꾸자꾸 미뤘다. 깨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었다. 16시간 전에 올라온 것도 있고. 분명 이전에는 없었는데 10개월 전 유포물이 이제야 나오기도 했다. 너무 빨리 퍼지고 너무 많이 퍼지더라. 처음에는 씩씩했는데, 맞설수록 더 절망감이 커졌다. 그리고 급기야 친구들 지인 통해서 들려오고. 이러다 가족도 알게 될까 두려웠다. 매일 밤 떠올랐다. 유포물 걱정은 일상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깔려 있었다. 무언가를 할 때는 잠시 잊었다가도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훅 올라왔다. 미래가 다 무너져내리는 걸까. 절망감이나 허망함도 찾아왔다.”

-피해자로서 편견을 느낀 적은

“피해자는 피해자다움을 요구받는다. 피해자는 너무 힘들어야 하고, 일상도 무너져있어야 한다고들 믿는다. 그런 무너진 모습이 피해를 증명한다는 시선도 있다. 저는 불법촬영물 유출 이후로도 사회활동을 하고, 힘들어도 일어서려고 계속 노력한다.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쟤는 힘들지 않나봐’ 이렇게 판단할까봐 무섭다. 내가 일도 그만두고 우울해야 하는 걸까. 내가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에 따라 가해자의 형량이 달라질까. 그런 게 너무 두렵다. 어차피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도 않겠지만. 그나마도 형량이 더 가벼워질까 두렵다. 그래도 주변에 모니터링을 도와주는 지인도 있고, 힘내라고 기프티콘을 보내주기도 한다. ‘네 잘못 아니다, 그 사람 잘못이다’라고 변호 받을 때 큰 위안을 얻는다.”

-성범죄에 맞서는 다른 활동에도 나섰다는데

“지난해 10월~12월 시민이 직접 포털·커뮤니티·SNS에서 불법촬영물을 적발하는 서울시 디지털시민모니터링단으로 활동했다. 다른 피해자들도 돕고 싶었다. 피해당사자인 나만큼 이 범죄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1주일에 2시간씩, 총 5주간 모니터링하고 리포트를 제출했다. 구글 등 포털에서 미성년 성착취물을 중점적으로 감시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성년자들이 본인 신체사진을 보냈는데 가해자들이 거기에 신상정보를 더해서 올리는 게시물들을 발견했다. ‘얘 자살했어’라는 댓글도 봤다. 그걸 캡처해서 신고하고 리포트를 썼다. 열심히 활동했는데 아쉽게도 활동에 대한 피드백은 받지 못했다. 다른 피해자를 위해 교내 지인들 모임에서 쪽지상담도 해준다. 온·오프라인 성범죄 피해자들인데, 다들 가족에게 피해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들에게 성범죄 신고 및 지원신청 절차 등에 대해 알려줬다.”

-최근 n번방 사건이 터졌다

“최근에는 n번방 외신제보 활동 중이다. 범행수단인 텔레그램의 서버는 외국에 있다. 그래서 ‘박사방’ ‘n번방’을 수사하려면 외국수사기관과 서버가 협조해야 한다. 외신에 알려야 한국에서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협조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권에 관심 많은 지인들이 모여서 디지털성범죄에 관련된 자료 정리·번역·메일 제보를 진행한다.”

-현재 상태는 어떤지

“피해 초기부터 세상이 무너질 듯 우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경찰 조사받고 버티려고 악을 썼다. 요즘은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심리상담을 받았는데, 의사는 내가 우울증의 범위에 있다더라. ‘상처 입은 사람이 괴물이 된다’ 그런 말 있지 않나. 내가 언제 괴물이 될까, 언제 정신질환이 올지 몰라 두렵다.”

-혼자 앓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나는 지금도 도망치고 싶다. 어젯밤에도 도망치는 꿈을 꿨다. 이민 가든지 해서 완전 잊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건 안되지 않나. 나와 다른 피해자들은 디지털성범죄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당사자가 돼버렸다.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분들처럼 저도 피해자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으로서 운동을 해야 후손들에게 더 좋은 사회가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피해자들에겐 여러분도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가만히 있든, 움직이든 어차피 힘들다. 나중에 할머니가 됐을 때, 내가 어떤 보탬이 돼서, 법이 바뀐다든지 해서 피해자들이 훨씬 살기 좋은 사회가 된다면 정말 뿌듯할 것 같다. 이미 내가 받은 피해는 누구도 보상해줄 수 없다. 죄인을 제대로 처벌해서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 그것이 사회의 몫이다. 혹시라도 판사 재량으로 가해자들에게 말도 안 되는 가벼운 형량이 나올까 봐 굉장히 두렵다. 정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느껴질 것 같다. 미국처럼 범죄자들에게 징역 300년쯤 선고했으면 좋겠다.”

이성훈 기자 tell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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