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선수가 노예인가, 어떻게…” 최숙현-경주시 이상한 계약서

국민일보

[단독] “선수가 노예인가, 어떻게…” 최숙현-경주시 이상한 계약서

입력 2020-07-08 00:05 수정 2020-07-08 00:05
트라이애슬론 한국 국가대표와 청소년 대표로 뛴 故 최숙현 선수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 오른쪽 사진은 故 최숙현 선수의 증명사진. 연합뉴스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한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국가대표 고(故) 최숙현 선수가 부당한 근로협약을 맺고 경주시청에 입단한 것으로 확인됐다. 수년간 폭행·폭언에 시달렸던 그는 실업팀 선수로서도 철저한 ‘을’이었다.

7일 경북 경주시와 경주시체육회에 따르면 최 선수는 2017년 경북체고를 졸업한 뒤 경주시청 직장운동경기부 트라이애슬론팀에 입단하면서 체육회 측과 1년 단위로 기간제 근로계약을 맺었다. 신분상 매년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비정규직 근로자였던 셈이다. 해당 계약은 최 선수가 컨디션 저조로 운동을 쉰 2018년을 제외한 2017, 2019년 모두 적용됐다.

“갑 마음대로” 독소조항으로 가득한 계약서

국민일보가 확보한 최 선수의 입단협약서와 연봉계약서를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독소조항이 곳곳에 숨어있었다. 관행에 너그러운 체육인들조차 “일반적이지 않다”며 고개를 저은 이상한 규정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8조 계약의 해지 항목 중 5항의 ‘을(선수)은 각 항의 계약해지 사안에 대해 일체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와 11조 ‘어구해석이 상호 상이할 시에는 갑(경주시체육회장)의 해석에 따른다’는 조항이다.

경주시청직장운동경기부 설치 및 운영관리 내규에 명시돼 있는 입단협약서상 독소조항

2018년 12월 경주시 철인3종경기 관련 송년회에 참석한 故 최숙현(왼쪽에서 4번째) 선수의 모습. 맨 왼쪽이 김규봉 경주시청팀 감독, 그 옆이 주장 장모 선수. 경주시철인3종협회 네이버카페 캡처

이들 조항에 따르면 선수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이의 제기를 할 권리가 없다. 또 분쟁이 생겼을 때 해석의 권한 역시 전적으로 팀에 있다. 서울이나 부산시체육회 관련 규정에서는 유사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항목들이다.

통상 선수가 훈련을 게을리하거나 질병 등으로 훈련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 여기까지는 타 지역 계약서도 엇비슷하다. 다른 점은 갑을 간 분쟁 해결에 관한 내용이다. 부산시체육회의 경우 근로계약서 11조에 ‘본 계약내용에 대한 분쟁이 있을 경우의 소송은 갑의 소재지 관할 법원으로 한다’는 조항을 별도로 뒀다. 경주체육회와 달리 분쟁 해결의 길은 열어둔 것이다.

부산시체육회 실업팀 설치 및 운영규정상 근로계약서. 어구해석과 관련된 조항이 없고, 계약 관계에서 문제 생길 경우 분쟁 해결에 관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노동 전문 김기덕 변호사는 이날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두 조항에 대해 “근로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적용된 사용자 편의적 규정이다. 그 자체가 법적으로 효력이 인정되지 않을 것”이라며 “일반 사기업도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법률적인 검토도 없이 근로계약서를 쓰는 게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권리는 무한대, 책임은 없는 갑

경주시청직장운동경기부 설치 및 운영관리 내규에 명시돼 있는 연봉계약서상 독소조항

계약 해지의 사유도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경주시체육회 입단협약서 및 연봉계약서상 해지사유를 보면 ‘성적이 부진할 때’ ‘기타 갑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라고 규정돼있다. 갑의 해지 권한을 최대한 폭넓게 열어놓은 것이다. 반면 부산시체육회 근로계약서에 따르면 ‘전국체육대회에서 2년간 득점이 없을 경우’ 등으로 해지 사유를 구체적으로 적시해놓았다. 권한을 가진 이가 경기력 부진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연봉계약서에는 지나치게 포괄적 규정도 등장한다. 연봉계약서 5조 기타조건에는 ‘을은 규정 및 계약서에 명시되지 아니한 사항은 갑이 정하는 바에 따라야 한다’는 조항이 나온다. 안 정한 건 다 갑의 뜻대로 한다는 얘기다. 을인 선수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항이다.

을의 책임은 무한대인 반면 갑의 의무가 빠져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이 역시 타 지역 계약서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부산시체육회 근로계약서를 보면 관련 조항에 기관의 의무로서 ‘갑은 을의 지도력 향상과 대회에서의 선전을 위해 예산 범위내에서 재정적, 행정적인 지원을 한다’고 명시돼있다. 최 선수가 맺은 계약은 한쪽의 의무는 쏙 뺀 채 선수에게만 일방적인 부담을 지운 것이다.

서울시 직장운동경기부 관리 운영규정에 명시된 입단계약서의 내용. 경주시 규정과 다르게 체육회의 의무도 적어놨다

2018년 12월 경주시 철인3종경기 관련 송년회에 참석한 故 최숙현(왼쪽에서 4번째) 선수의 모습. 맨 왼쪽이 김규봉 경주시청팀 감독이고, 맞은편에 앉은 여성이 주장 선수다. 경주시철인3종협회 네이버카페 캡처

경주시청직장운동경기부 설치 및 운영관리 내규에 명시돼 있는 서약서상 독소조항

선수들이 입단할 때 맺는 서약서에도 이상한 조항은 있었다. 서약서에는 해임을 당해도 선수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7가지가 적시돼있는데 이중 하나가 ‘계약자가 각종 행사 참석 요청시 참여한다’는 항목이다. 서울의 경우에도 유사조항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용이 미묘하게 다르다. 선수는 ‘서울시의 요청이 있을 경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입단계약서 4조 3항) 행사에 참여한다는 내용이다. 그나마 선수가 상황에 따라 행사 참석을 거부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둔 것이다.

부산체육계 한 고위인사는 이 조항에 대해 “경기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실업팀은 단체장 입김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지만 올 초 민선 체육회가 출범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규정을 현실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당한 계약관계에 대해 경주시와 경주시체육회 어느 쪽도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경주시는 실업팀 운영을 체육회에 위탁한 터라 최 선수가 당시 맺은 정확한 계약 내용을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여준기 경주시체육회장도 통화에서 “지금은 폭행, 성희롱 의혹을 받는 팀 닥터 고발과 대한철인3종협회의 징계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관련 내용을 자세히 파악해보겠다”고 말했다.

“임신하면 은퇴종용” 우리가 몰랐던 인권사각

지난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철인3종협회 스포츠공정위원회에서 故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김규봉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감독이 소명을 마친 뒤 회의장에서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최 선수가 쏘아 올린 경주시청 실업팀 문제뿐만 아니라 체육계 전반에도 이러한 관행이 팽배해 있다고 지적한다.

허정훈 체육시민연대 공동대표(중앙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는 “최고 대우를 약속한 뒤 이면계약서를 쓰게 하거나 임신한 여성 선수에게 은퇴를 종용하는 등 불공정하고 반인권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 문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상담 끝에 겨우 이겨낸 선수도 알고 있다”며 “실업팀 선수들은 근로조건과 처우가 열악한 노동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허 대표는 그러면서 “절대 권력자인 감독, 코치, 선배가 있는 구조에서 재계약이 중요한 선수들은 기관에 말 한마디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 차원의 실태조사로 실업팀 선수가 겪는 문제 원인과 해결방안이 나왔지만 정작 실천이 지연되고 있다. 그사이 애꿎은 선수들만 희생당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모든 실업팀에 적용되는 표준근로계약서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여준형 젊은 빙상인연대 대표도 “팀을 구하기 힘든 탓에 계약서상에 문제가 있어도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구조다. 비인기 종목 선수들은 더욱 그렇다”며 “관료들이 각 종목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을 가지고 선수들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팀닥터’ 안씨에 책임 모는 체육계…‘꼬리자르기’ 눈총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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