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처럼 믿으라더니… 성폭력에 두번 우는 탈북여성들

국민일보

오빠처럼 믿으라더니… 성폭력에 두번 우는 탈북여성들

입력 2020-08-01 00:30

“한국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인데다 ‘아빠처럼, 오빠처럼 믿고 지내라’고 하니 이 사람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어요”(한서은·가명)

“돈도 없고, 형제도 가족도 없으니까 내가 반항해봤자 죽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 거예요”(최은지·가명)

10여년 전 한국에 정착한 30대 탈북민 한서은(가명)씨는 2018년 5월 국군정보사령부 군인 2명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며 국방부 검찰단에 지난해 12월 고소했다. 한국 정착을 도와주겠다며 접근한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한 한씨는 두 번의 임신중절수술을 하고도 1년 넘게 문제를 제기하거나 신고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난 28일엔 북한이탈여성 A씨가 자신을 오랫동안 성폭행 했다며 신변보호담당관으로 활동했던 현직 경찰 B경위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A씨 측은 B경위가 정보수집 등을 이유로 A씨에게 접근해 2016년 5월부터 19개월간 12차례에 걸쳐 성폭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현재 B경위는 지난 31일 사적인 관계에서 생긴 일이라며 A씨를 무고와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맞고소했다.

북한이탈여성들은 남성 중심적인 성문화가 강한 북한에서 자란 탓에 성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성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다고 털어놓았다. 한씨는 “북한 출신 여성들은 성폭행 사실은 물론 연인 관계에서의 성관계가 알려지는 것도 엄청난 수치로 생각하기 때문에 성폭력을 당하고도 혼자 숨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A씨를 대리한 전수미 굿로이어스 공익법률센터 변호사도 “북한에서 겁탈이나 강간을 당하면 ‘여자가 부도덕하고 행실을 잘못해서 당한 것’이라는 인식이 아직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탈주민 커뮤니티가 폐쇄적인 탓에 피해자들이 성폭력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성폭력을 은폐하기 쉽게 만드는 구조다. 역시 북한 출신으로 홀로 한국에 정착한 20대 최은지(가명)씨는 지난해 2월 탈북민 남성 2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오랜기간 의지하며 친하게 지내던 동향 출신 지인들과 술을 마시던 중 상상도 못한 일을 겪은 것이다. 성폭력상담소의 존재도 몰랐던 최씨는 신변보호담당관의 안내로 겨우 경찰에 신고했지만, 지난해 1심에서 가해자들에게 무죄 판결이 나오자 항소심을 준비하고 있다.


한씨는 “커뮤니티가 좁아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며 “공개되지 않았을 뿐 실제로 성폭력 사건은 너무나 많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지인들에게 자신들의 성폭행 사실을 퍼뜨린 것을 안 뒤로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최씨는 “사람들이 다들 나를 손가락질 하면 했지 내 편을 들 것 같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최씨는 또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같은 처지에 범죄자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 가해자들에게 엄벌을 요구하기 주저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한국에서 의지할 곳이 없는 탓에 성폭력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한씨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법적 지식도 없고 어떻게 신고해야 할지도 몰랐다”며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자세히 말하지 못하고 ‘나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끌려다니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에 의지할 곳이 없는 탓에 북한이탈여성들은 경찰이나 군인 등 위력 있는 이들에 의한 권력형 성폭력에 노출되기 쉽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씨는 “명절 때 선물을 챙겨주거나 취업과 공부에 도움을 주는 등 한국에 처음 와서 정착을 도와준 유일한 사람들이다 보니 전적으로 의지하게 됐고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성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은 탈북남성들을 성폭력 가해자로 내모는 요인이기도 했다. 전 변호사는 “강제추행죄 자체가 없는 북한 문화에 익숙한 북한이탈남성들이 한국에서 여성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하다가 형사처벌 당하는 경우도 많다”며 “북한이탈여성들이 겪는 성폭력 가해자 중 북한이탈남성 비율이 높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국에서 들어와서도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씨는 “하나원에서도 성폭력 관련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 없다”며 “자신의 인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최씨도 “하나원과 대안학교에서 ‘성폭력을 겪으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교육하지만 실제로 겪었을 때는 그대로 실행하기 어려웠다”며 “성폭력상담소나 피해자지원센터의 존재도 몰랐다”고 말했다.

남영화 미래한반도여성협회 대표는 “성폭력 피해를 상담하러 온 북한이탈여성들 중에도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을 수치스러워 해서 법적 처벌을 원하지 않는 사례가 많다”며 “한국에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목소리를 낸 것 자체가 굉장히 큰 용기를 낸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탈여성들의 성폭력 사건을 다수 다뤄온 전 변호사는 “북한이탈여성들의 성폭력 피해는 오랫동안 있어왔지만 지난해 말 미투가 시작되며 겨우 알려지기 시작했다”며 “북한이탈주민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관련 교육이 보다 실효성 있게 이뤄지는 동시에, 북한이탈주민과 접촉하는 한국 사회도 이들을 ‘2등 시민’으로 여기지 않고 동등한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애 기자 am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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