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후임은 좋은 대통령이 임명하기를”…긴즈버그 꿈, 꺾이나

국민일보

“내 후임은 좋은 대통령이 임명하기를”…긴즈버그 꿈, 꺾이나

여성·소수자 위했던 긴즈버그 대법관, 별세
‘성 평등 선구자’·페미니스트 아이콘’ 평가
긴즈버그 후임자 문제, 미국 대선 이슈 부상

입력 2020-09-20 09:13 수정 2020-09-20 13:33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이 2018년 11월 30일 찍은 사진. ‘성 평등의 법률적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평생 여성 인권을 위해 노력했던 긴즈버그 대법관이 18일(현지시간) 별세했다. AP뉴시스

키 150㎝, 몸무게 45㎏. 몸은 연약했으나 여성의 권리에 대해선 강인한 사람이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평가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이 18일(현지시간) 별세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긴즈버그 대법관이 췌장암 전이에 따른 합병증으로 워싱턴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향년 87세.

워싱턴포스트(WP)는 긴즈버그 대법관을 ‘성 평등의 법률적 선구자’라고 표현했고, NYT는 ‘페미니스트 아이콘’이라고 썼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었다.

긴즈버그의 별세는 대선을 6주 앞둔 미국 정치권에 새로운 논란거리를 낳았다. 바로 후임 대법관 임명 문제다.

모두 9명인 미국 대법관들의 이념 지형도는 지금까지 보수 5명·진보 4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를 대표했던 긴즈버그의 사망이 변수로 등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진보를 대표했던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으로 보수 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할 경우 미국 대법원은 보수 6명·진보 3명이 돼 보수 쪽으로 확 기울게 된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자 지명을 “지체 없이(without delay)” 할 것이라고 19일 밝혔다. 그는 이어 “다음 주에 여성 (대법관) 후보를 지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총력 저지에 나선다는 방침이지만 상원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이 밀어붙일 경우 답이 없는 상황이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암 투병을 하면서도 민주당 소속의 차기 대통령이 자신의 후임 대법관을 지명하기를 기대했다고 NYT는 전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나는 (트럼프 대통령 임기에는) 전력을 다해 버틸 것”이라며 “다음 대통령은 좋은 대통령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NYT는 보도했다. 생전 긴즈버그 대법관의 소원이 이뤄질지, 무참히 깨질 지에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이 연방대법관으로 지명된 이후인 1993년 6월 14일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당시 긴즈버그는 연방대법관 후보자 신분이었다. AP뉴시스

“나는 반대한다”…여성·약자를 위했던 법률적 선구자

긴즈버그 대법관은 췌장암·폐암에 시달려왔다. 결국 췌장암 전이에 따른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긴즈버그는 암과 싸우면서도 대법원 공개 변론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고 WP는 전했다.

긴즈버그는 1933년 유대계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긴즈버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벌레였다. 긴즈버그는 전액 장학금으로 코넬대에 입학했고,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러나 하버드에서 겪은 성 차별과 함께 남편이 뉴욕 로펌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로스쿨로 옮겼다. 긴즈버그는 컬럼비아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다. “유대인이자 여성이자 어머니”라는 세 가지 이유가 발목을 잡았었다고 긴즈버그는 회고하기도 했다.

긴즈버그는 럿거스 대학의 법학 교수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1972년 여성 최초로 모교인 컬럼비아 로스쿨의 교수가 됐다. 법학 교수를 하면서도 성 평등과 소수자 등 약자를 위한 변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긴즈버그는 1993년 민주당 소속이었던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의 지명으로 대법관 자리에 올랐다. 긴즈버그는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전향적인 판결을 내리는 데 앞장섰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지급 판결과 버지니아 군사학교의 여성 입학 불허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긴즈버그는 대법원이 보수적인 결정을 내릴 때마다 “나는 반대한다(I Dissent)”고 외쳤다. 이 말은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나는 반대한다”는 제목으로 긴즈버그를 다룬 책과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다.

NYT는 긴즈버그의 삶이 젊은이들에게 ‘문화적 아이콘’이 됐다고 보도했다. 미국 젊은이들은 ‘악명 높은 R.B.G(notorious RBG·긴즈버그 이름 약자)’라는 반어법적인 애칭으로 부르며 열광했다.

긴즈버그는 코넬대를 다닐 때 만났던 마틴 긴즈버그와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세금법 전문가였던 마틴은 2010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의 별세를 애도하면서 19일(현지시간) 조기를 내걸었다. AP뉴시스

대선 이슈된 긴즈버그 후임자 문제…트럼프 “다음 주 지명”

트럼프 대통령은 긴즈버그 대법관 후임자를 곧 지명하겠다고 공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올린 트위터 글에서 “우리는 우리를 자랑스럽게 선출한 사람들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할 권력과 중요성을 갖고 있다”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 대법관의 선출로 여겨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이 의무가 있다. 지체 없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노스캐롤라이나주 페이엇빌에서 열린 대선 유세에서 “다음 주에 (대법관) 후보를 지명할 것”이라며 “여성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의 후임자 지명 속도전은 4년 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 논란을 빚고 있다.

미국 대선이 실시됐던 2016년 2월 보수 성향의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별세하자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진보적인 메릭 갤런드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했다. 그러나 상원을 장악했던 공화당은 인준을 거부했다. 결국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한 뒤 보수 성향의 닐 고서치 대법관이 지명됐다.

민주당은 올해 대선 이후 대법관 후보자가 지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도 “다음 대법관은 대선 이후 새 대통령이 선임해야 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새 대법관을 지명할 경우 민주당으로선 막을 방법이 없다. 다만, 대선까지 45일밖에 안 남은 데다 공화당 내부에서 반란표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변수다.

새 대법관 후보로는 보수 성향 여성인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고등법원 판사와 제11연방고법의 쿠바계 여성인 바버라 라고아 판사 등이 거론된다. NBC방송은 배럿 판사가 선두주자라고 보도했다.

긴즈버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뒤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긴즈버그가 세상을 떠난 18일 밤 대법원 앞에 수백명의 시민이 모여 촛불과 꽃, 추모 메시지가 적힌 카드 등을 들고 모이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긴즈버그는 불편한 관계였다. 긴즈버그는 트럼프 대통령을 “사기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긴즈버그 별세와 관련해 “선구자의 상실을 애도한다”는 추모 포고문을 발표하고, 백악관을 포함한 모든 연방 정부 건물에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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