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진 공무원이 남긴 ‘밧줄 속 슬리퍼’…SNS엔 아들·딸 사진

국민일보

숨진 공무원이 남긴 ‘밧줄 속 슬리퍼’…SNS엔 아들·딸 사진

입력 2020-09-25 04:00
숨진 이씨의 공무원증. 오른쪽은 이씨가 남기고 간 슬리퍼 사진. 연합뉴스

북한의 총격으로 사망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47)씨의 생전 행적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이씨가 실종 전 남긴 슬리퍼 사진이 공개됐고, 그가 최근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SNS 계정도 나왔다. 특히 이씨는 SNS에 자녀의 사진을 자주 올리는 등 극진한 애정을 드러냈던 것으로 알려져 주변의 안타까움을 샀다.

인천해양경찰서는 이씨가 사망 전 탑승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에 대한 현장조사 과정에서 찍은 슬리퍼 사진을 24일 공개했다. 사진 속 슬리퍼는 굵은 밧줄 더미 속에 파묻히다시피 놓여있었다. 해경은 이와 관련 “발견했을 때 슬리퍼가 밧줄 안에 있었던 것은 맞다”면서도 “밧줄 형태 등이 조금 바뀌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종 당시 슬리퍼가 놓여있던 모습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날 이씨의 SNS 계정도 많은 네티즌의 관심을 받았다. 이씨는 SNS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 아들·딸 사진 등을 올리며 지인들과 일상을 공유해왔다. 실제로 이날 확인한 이씨의 SNS에는 자녀들의 사진이 많이 남아있었다. 지난 2월에는 딸이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올리며 “생애 두 번째 스케이트 타는 딸”이라고 말했고,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에는 트리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딸의 사진에 “꽁주(공주)”라고 적어 애정을 표현했다.

아들을 언급한 게시물도 있다. 이씨는 2018년 중학교 3학년이던 아들의 시험 성적표를 올리며 아들 올 A 잘했어“라고 칭찬했다. 아들이 지난해 중학교 졸업식에서 국회의원 표창장을 받았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이씨는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SNS의 가장 최근 게시물은 지난 6월에 올라온 것으로, 전남 목포의 한 미혼모 주거지원 시설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사진이다. 본인이 속한 해수부 서해어업관리단의 공식 게시물도 다수 공유했다. 서해어업관리단이 중국 어선을 집중 단속했다는 인터넷 기사 링크, 채용 공고, 순직한 주무관을 추모하는 게시물 등이다. 지난해 12월에는 드론 조종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는 모습도 올렸다.

이씨의 선실 내부 모습. 연합뉴스(이씨 형 제공)

이씨의 유족은 평범했던 이씨의 월북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씨의 친형은 페이스북 글에서 “(군 당국이) 동생을 나쁜 월북자로 만들어 책임을 피하려는 것 아닌지 의문”이라며 “동생이 우리 영해에 있었던 미스터리한 시간을 덮으려는 것으로 의심이 든다”고 주장했다. 이씨의 동료도 “평소 이씨가 월북하려 했다는 낌새를 전혀 못 느꼈다”면서 국방부 발표에 동의할 수 없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이씨가 실종 후 북쪽 해상에서 발견됐을 당시 북측에 월북 의사를 표명한 점이 식별됐다며 “자진 월북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이씨가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있었고, 선박을 이탈할 때 슬리퍼를 벗어뒀고, 소형 부유물을 이용한 점 등을 종합하면 월북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해수부 측도 이씨가 자진 월북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서도 “슬리퍼를 가지런히 벗어놓은 것으로 봐서 단순 실족이라는 추측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소속인 이씨는 2012년 기능직 9급 선박항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공무원으로 임용되기 전 원양어선의 선장으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다른 선박에 타고 있다가 지난 17일 연평도 해상에서 무궁화 10호에 처음 승선했으며 나흘 뒤인 21일 소연평도 남쪽 2.2㎞ 해상에서 실종됐다. 이후 북측 해상에서 발견된 이씨는 북한군에 의해 피살됐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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