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목의 성경 현장]더 이상 뽕나무에 오르지 않는 삭개오…돌무화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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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의 성경 현장]더 이상 뽕나무에 오르지 않는 삭개오…돌무화과나무

성경의 식물들-사실과 상징적 의미 ⑤

입력 2020-11-01 07:00 수정 2020-11-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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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돌무화과나무 열매

교회를 웬만큼 다닌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삭개오 이야기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올라갔던 나무가 뽕나무였던 것쯤은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이 여리고에 들르면 반드시 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삭개오가 올라갔던 뽕나무다. 지금도 여리고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나무가 하나 우뚝 서 있다. 나무 아래 가까이 가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사진도 찍어보지만 이상한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뽕나무와 그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더 이상한 것은 어느 한 사람도 이 나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2010년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개정개역성경에서 삭개오는 더 이상 뽕나무에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관심 있는 성도라면 갑자기 사라진 뽕나무에 적잖게 당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서 처음 사용된 언어가 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반면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됐다. 우리가 성경을 사용하기 위해서 불가불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차이나 또는 언어적 차이 때문에 오류 또는 착오가 얼마든지 일어나 수 있다. 뽕나무가 이와 같은 번역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오류 사례라고 보면 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헬라어로 ‘시코모레’라고 불리는 나무에 올라갔다. 사실 시코모레나무는 우리나라에 자라지 않기 때문에 우리말 이름도 없다. 하지만 시코모레 나무 열매의 모양이 무화과와 유사하게 생겼고 무화과보다는 크기가 작고, 단맛이 덜해서 우리말로 ‘돌무화과나무’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2010년 이전에는 시코모레 나무를 우리말 성경에서 뽕나무로 번역했다. 왜 이 나무가 뽕나무로 둔갑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추측하건대 우리가 알고 있는 뽕나무가 헬라어로 ‘시카미네’(누가복음 17:6)인데 삭개오가 올라간 시코모레(돌무화과나무)와 그 발음이 비슷해서 번역할 때 착오를 일으켰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그러면 구약성경에는 뽕나무가 등장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말로 번역된 구약성경에 뽕나무가 11번 등장한다. 그 가운데 7번은 돌무화나무(히브리어 쉬크마)를 뽕나무로 오역했다. 대표적인 예로 아모스 7장 14절 말씀을 보면 아모스는 자기를 뽕나무를 배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팩트는 아모스가 길렀던 나무는 뽕나무가 아니라 삭개오가 올라갔던 나무와 동일한 돌무화과나무였다는 것이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올라갔고 아모스 선지자가 재배했던 돌무화과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구약시대부터 이 나무는 이스라엘에서 목재로서 최고 가치를 인정받는 나무였으며 또한 사람들은 그 열매를 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나무를 특이한 방법으로 재배했는데, 재생력이 탁월하고 빠르게 자라는 나무의 특성을 최대한 이용했다. 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도끼로 나무의 원 줄기를 자른다. 그러면 그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몇 개의 새로운 가지들이 나오는데 그것들을 목재로 키워냈다. 그리고 돌무화과나무는 6년이면, 즉 안식년이 되기 전에 목재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 자랐다.

이런 돌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건축자재로 사용됐다. 이스라엘의 집은 사방을 돌로 쌓고, 그 위에 나무 들보를 가로 놓고, 종려나무 가지나 작은 나뭇가지를 걸친 다음 진흙으로 덮어 지붕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돌무화과나무는 백향목보다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나무였다. 크고 작은 지진이 일어났던 이스라엘에서 지붕의 들보로 사용되는 데는 돌무화과나무는 오히려 백향목보다 더 유용한 재료로 취급됐다.

돌무화과나무의 용도가 이렇다 보니 탈무드에는 이 나무를 건축 재료로 사용하도록 규정까지 마련했다. 이스라엘에서 2층 이상의 집을 대여하는 사람이 지붕 들보를 백향목으로 짓는 것을 금했다. 만약 백향목으로 지은 집에서 지붕이 무너질 경우 집주인은 돌무화과나무로 지은 집보다 더 많은 돈을 세입자에게 보상해야만 했다. 이 같은 용도와 가치 때문에 다윗은 돌무화과나무를 배양하는 전담 장관을 세울 정도였다. “게델 사람 바알하난은 평야의 감람나무와 뽕나무(돌무화과나무)를 맡았고 요아스는 기름 곳간을 맡았고”(대상 27:28)


이런 돌무화과나무는 그 열매를 식용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칠칠절이 끝나는 시기(즉 밀 수확이 끝나는 시기/5월)가 되면 이 나무에는 수많은 열매가 열리게 되는데 그 열매에 일일이 흠집을 내고 올리브 기름을 발라 주어야 비로소 일반 무화과 맛을 내게 된다. 이 과정을 전문용어로 블리사(Blissa)라고 부르는데 목자들이 이 일을 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가축들을 먹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스라엘에서 돌무화과나무는 비가 많고, 날씨가 온화한 지역에서 자란다. 그러다 보니 이 나무는 요르단 계곡 또는 평지(쉐펠라)에서 많이 재배됐다.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돌무화과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왕상 10:27)

이스라엘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나눠진다(우기 11월~3월, 건기 4월~10월). 그리고 보리와 밀의 추수는 4월에 시작해서 5월에 끝난다. 우기에 목자들은 광야에서 푸른 풀을 먹인다. 그리고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4월에서 추수가 끝나는 5월까지는 광야의 건초로 양과 염소를 먹인다. 5월쯤 요단계곡에는 추수가 끝난 밭에 보리와 밀의 밑동이 남게 된다. 목자들은 앞으로 우기가 시작되기까지 5개월이나 되는 건기를 보내기 위해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목자들은 요단계곡으로 내려가 추수가 끝난 밭에서 가축들을 먹였다. 이런 상황에서 목자들과 밀밭 주인 사이에 협상이 진행된다. 목자는 자신들이 가축을 추수가 끝난 밀의 밑동을 먹도록 요청하고 밀밭 주인은 목자들에게 그 대가로 돌무화과나무를 배양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모스는 뽕나무를 길러 누에를 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목동이었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열매에 흠집을 내고 올리브 기름을 발랐던 사람이었다.

다시 삭개오로 돌아가 그날 그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리고는 의인을 상징하는 종려나무가 많았던 도시였다(대하28:15). 그래서 종려나무 성으로 불릴 정도였다. 삭개오가 누구였던가. 유대인의 눈에 그는 민족을 배반한 배신자요, 죄인 중의 죄인이다. 성경은 삭개오를 여리고의 세리장으로 소개한다. 이 한 단어에 아주 많은 정보가 압축돼 있다. 그중 하나가 그는 누가 뭐래도 돈 있고 권력 있는 여리고의 VVIP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삭개오는 의인을 상징하는 종려나무보다 비천한 목동들이 올라가는 돌무화과나무를 택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의 진짜 목적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였다. 간절함으로밖에 달리 어떻게 그의 마음과 행동을 표현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이스라엘 현장을 뒤지며 지리, 역사, 고고학, 문화 모든 것들을 통해서 그분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가운데 더욱 확신했던 사실은 누가 뭐래도 그분은 최고의 교육자요 극적인 연출가였다. 그런 그가 이 절호의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돌무화과나무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쉬크마’는 ‘재활’ 또는 ‘갱생’의 뜻을 가지고 있다. VVIP란 자기를 다 내려놓을 만큼 간절했던 삭개오 그리고 돌무화과나무가 주는 언어적 상징적 의미 그리고 나무 위를 바라보시며 예수님이 하신 선언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를 보라.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사건이요 메시지의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예수님의 탁월한 연출이었다. 비록 더 이상 뽕나무에 오르지 않는 삭개오 때문에 당황스러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역을 바로 잡아 그분의 메시지와 의도를 볼 수 있는 여지를 준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김상목 성경현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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