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에게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어떨까요? [아직 살만한 세상]

국민일보

고3에게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어떨까요? [아직 살만한 세상]

입력 2020-12-02 11:43 수정 2020-12-02 11:53

인터넷 공간에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의 다양한 사연이 오갑니다. 최근 똑같은 상황에 놓인 두 사람의 전혀 다른 대처가 네티즌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데요. 주인공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고3 수험생들입니다.

지난달 30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이런 거 붙어 있길래 신기해서 올려봐!”라는 짧은 글과 함께 사진 한장이 공개됐습니다. 글쓴이가 직접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이미지였습니다. 따뜻한 분홍색 편지지에 정갈한 글씨체. 아파트 엘리베이터 게시판 한쪽에 붙어 있었다는 긴 편지는 “안녕하세요. 1104호에 사는 고3 수험생입니다”라는 정중한 인사로 시작됩니다.

“벌써 11월이 지나고 있네요. 의미있게 마무리하시고 12월에는 더욱 즐겁고 행복한 일들로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다름아닌 오전 공사 소리에 조금 방해를 받는 것 같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고3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제게는 살면서 가장 중요한 첫 시험, 가장 길게 준비한 시험을 앞두고 있기에 간곡히 요청드리려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 올립니다.”


수능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파트 공사 소음에 시달리고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이웃 주민들을 향한 인사로 시작해 이번 시험이 자신에게 얼마나 의미깊고 소중한 기회인지를 써내려갔습니다. 편지지 맨 위에는 “일이 해결되면 자체적으로 수거할 예정입니다”라는 문구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적었습니다.

“공동체 생활에 제가 이렇게 함부로 건의드리는 게 망설여져 지금까지 독서실을 이용해 왔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2단계로 격상되면서 독서실에 가는 것도 솔직히 큰 고민이 됩니다. 상황이 어렵지 않으시다면 공사 연기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여의치 않으시다면 학원 시간을 오전 10시로 조정하여, 수능 전까지만이라도 오전 10시 이후에 공사를 진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너른 양해 정중히 부탁드리고 긴 글 읽어주심에 큰 감사를 표합니다. 항상 건강 조심하시며 앞날의 행복한 일들과 무한한 행운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실 이 수험생의 편지가 화제를 모은 건 그보다 며칠 앞서 각종 SNS에 공개된 한장의 사진 때문이기도 한데요. 똑같이 수능을 앞두고 있는 한 학생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부착한 경고문이죠. ‘수능 D-8인데 2주째 드릴 소리 내는 가정교육 못 받은 무뇌들’이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니 인테리어 사리사욕 챙기려고 남의 인생 피해 주지는 말아야지 이기적인 색X야” “내일부터는 니 부모가 홀수 아닌걸 증명하듯 그만 들렸으면 좋겠다” “어린 놈한테 욕 먹으니까 기분 나쁘지?” “니 자식이 나중에 누군가 생각없이 겨울철 집앞에 오줌 싸놓은 거에 미끄러져서 식물인간 판정 받을지도 몰라” “나이 다 X먹은 새X 훈계하기 나도 싫어요” 등의 표현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인생에서 맞는 가장 중요한 시험인 수능. 고3 학생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공사 소음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도 잘 알고요. 하지만 이걸 다 이해하는 네티즌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결국 당시 글은 논란을 빚었고 당사자의 사과문이 게재되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반면 이번에 공개된 분홍색 편지 사연의 결말은 어땠을까요? 커뮤니티 글에 수백개의 댓글이 달리자 주인공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거 난데 뭔가 되게 쑥스럽네요” 하면서요. 자신의 상황을 공감해주고 칭찬해준 네티즌들에게 감사 인사를 먼저 전했습니다. 그리고 불편해하는 일부 사람들을 위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공개했습니다.


“왜 굳이 엘베에 붙였냐면, 공사하는 집이 꽤 많았는데 제가 인지하고 있는 분들께는 같은 편지랑 초콜릿 등을 챙겨서 문 앞에 놔두고 예비 입주자분들은 집에 안 계셔서 엘베에도 붙인 것입니다. 저거 붙이고 하루 이틀 정도 뒤에 수능 응원이랑 사과 말씀 해주셔서 바로 뗐어요!”

“공부 못하는 애들이 잘 시끄러워한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는데, 맞아요. 저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에요. 귀마개도 계속 썼지만 외이도염에 걸리고 나서는 귀마개를 착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공사 소리가 좀 커서 건의하게 되었습니다. 주민분들께서 너그러이 이해해주셔서 공사는 대부분이 미뤄진 것 같고 예정돼 있던 공사도 수능 끝난 주부터 시작할 거라 하더라고요! 요즘엔 제가 건의한 게 죄송할 만큼 조용합니다ㅎㅎ”

훈훈한 결말입니다. 간식거리까지 손수 준비해 찾아가 정중히 부탁하는 수험생에게 공사 연기를 약속하고 응원까지 건넸다는 입주민들. 주인공은 마지막으로 “꼭 수능 잘 봐서 대학 멋지게 합격하고 감사하다고 인사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썼습니다. 선한 말과 행동은 또 다른 선한 일을 불러옵니다. 편지에 깃든 예쁜 마음이 좋은 결과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아마 꼭 그렇게 될 거고요.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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