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은 지옥행, 벗어나고 싶다” 팀장의 마지막 메모 [이슈&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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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은 지옥행, 벗어나고 싶다” 팀장의 마지막 메모 [이슈&탐사]

[일이 부른 마음의 병] ②정신질환 산재 사망자들이 남긴 유서

입력 2021-02-19 06:02 수정 2021-02-19 06:02
산업 현장에서 물리적 사고로 숨지거나 다친 사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마음을 다쳤다고 호소하는 직장인도 많습니다. 업무 스트레스와 괴롭힘, 성희롱 등으로 마음의 병이 생긴 경우에도 산업재해 신청이 가능합니다. 정신질환 산재 신청은 점점 늘고 있습니다. 국민일보 취재팀은 정신질환 산재의 현실을 5회 시리즈로 보도합니다. 시리즈 1회의 두 번째 기사는 업무로 정신질환이 생겨 극단적 선택을 한 직장인들이 남긴 유서 내용을 다뤘습니다.


“죄송합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같습니다. 많은 숙제를 드려 죄송합니다.” (박철수(가명)씨의 유서 중 일부 내용)

자살 뒤 정신질환 산재를 인정받은 박씨는 마지막 순간에도 주변에 미안함을 표시했다. 건설현장 소장으로 일했던 그는 2017년 충북 한 도시에서 관급공사를 맡았다. 자재 납품이 지연된 데다 그해 여름 홍수가 발생하면서 공사에 차질이 빚어졌다. 공사기간 연장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준공시간에 쫓겨 매일같이 야간·휴일 근무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런 와중에 ‘공사가 늦어지면 지체보상금을 물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회사에 큰 손실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에 심리적 압박감이 극에 이르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

그는 유서에서 함께 고생한 동료를 언급하며 스스로를 탓했다. “열심히 했다. 새벽같이 나와 고생한 O감독, O계장, O과장 다 안다”고 적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은 “관급 (공사가) 좋지만 우리 지역 업체 얘기는 듣지 않는다”는 내용 정도였다.

취재팀은 2018년부터 2020년 4월까지 자살 산재 업무상질병판정서 142건을 분석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장인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청구해 공단이 작성한 서류다. 질병판정서에는 세상을 떠난 직장인, 노동자가 남긴 유서·자필메모·일기가 포함돼 있다. 상당수가 죽음을 결심한 순간에도 자책하거나 일과 회사를 생각했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연애도 하지 않았다는 유서도 있었다. 전북 한 고등학교에서 영양사로 일하던 오경원(가명)씨는 사망 전 메모에서 “일을 좋아해보려 연애도 포기하고 앞만 봤는데 막막한 어둠이다”라며 “하루에 열 번, 스무 번 고치며 식단을 잡아도 (일이) 잘 안 됐다. 내 증세를 알아보러 가기에 너무 몸이 지쳐 쓰러지기 바빴다”고 썼다.

근로복지공단의 질병판정서에 따르면 오씨는 급식 민원으로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음식을 줬다’는 항의를 수시로 받았다. 학부모 민원으로 감사까지 받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조리사들과의 의사소통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직장 내 누구도 그를 지지해주지 않았고 퇴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메모에 “학교에서 누군가 관심이 있었다면 내 증상이 이 정도로 심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앞으로 해야 할 게 막막한데 정신이 드니 지금은 막다른 골목”이라고 썼다.


건설회사 공사팀장이던 안세훈(가명)씨의 유서에는 그가 얼마나 큰 업무 부담을 느꼈는지가 드러난다. 그는 “출근길은 지옥행이다. 20년간 이런 출근길은 처음이다. 지금 이 순간도 지옥행… (중략) 못난 사람은 이 정도도 못 견디고 이제 그만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다. 제발”이라고 적었다.

안씨는 딸의 성장 과정을 기록하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등 적극적이고 활기찬 사람이었다. 하지만 2018년 1월 말 원치 않던 건설현장으로 발령되면서 점차 무기력해졌다. 2월 초 현장소장이 퇴사하고 함께 일하던 직원까지 그만두면서 심리적 부담이 커졌다. 사무실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한 달 이상 혼자 공사를 총괄 진행하고 마무리해야 했다. 감리단이 요구하는 업무 수준을 감당하기에는 회사의 규모가 작고 현장 인력이 적었다. 2개월 만에 체중이 10㎏정도 빠졌다. 병가를 냈지만 회사는 병가기간에 주 1회 이상 출근하길 요구했다.

자살 노동자들이 남긴 기록에는 ‘민원·고객과 갈등’의 흔적도 있다. 아파트 관리소장 나상호(가명)씨는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과 동대표 선거와 관련해 아파트 입주민들의 항의가 심해지자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는 유서에 “질타와 경멸에 가까운 공격을 보고 마음 졸이며 몸 둘 바 몰라한 지도 오래됐다”며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으나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적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green@kmib.co.kr

[일이 부른 마음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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