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에 슈퍼맨이 나타났습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

국민일보

“논두렁에 슈퍼맨이 나타났습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

입력 2021-02-20 08:07 수정 2021-02-20 08:07
장경숙씨 제공

운전석을 뛰쳐나간 버스기사가 30분가량이 지나 눈을 비비며 버스로 돌아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난 11일 오전 10시25분경 구미 신동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멀리 비닐하우스 위로 치솟는 검붉은 불길을 본 버스기사 노남규(36)씨는 급히 차를 세웠습니다. 즉각 119에 신고를 한 노씨는 버스에 탄 승객들에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리고는 버스 안에 비치된 소화기 두 개를 챙겨 들고 뛰어나갔습니다. 검은 연기가 나는 방향으로 말이죠.

불이 나는 비닐하우스까지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습니다. 노씨는 8분 가량을 달려 현장에 도착했고 소화기를 사용해 초기 화재를 진압했습니다.

검붉은 불길을 확인한 후 소화기를 들고 달려나가기까지 노씨의 행동에는 한치의 주저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화재현장을 향해 달려가던 노씨의 모습은 당시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장경숙(58)씨가 촬영한 영상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영상을 보면 양손에 소화기를 든 노씨는 논두렁을 따라 한참을 달리고 또 달립니다.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한 숨도 쉬지 않고 말이죠.

노씨는 버스로 돌아오는 길에 논두렁에 빠진 구급차를 발견해 이를 빼내는 데도 힘을 보탰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죠.

노씨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불길을 보는 순간 큰불로 이어질까 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과거 배웠던 소화기 사용법이 떠올라 그대로 실행했다는 게 노씨의 설명이었습니다.

달리는 동안 마스크 때문에 숨이 찼지만, 불이 번지기 전에 빨리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멈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 노씨는 “달리던 중 논두렁에 발이 빠졌던 탓에 젖은 양말을 신은 채 늦은 밤까지 근무하느라 발에서 냄새가 났다”면서 웃었습니다.

노씨는 무엇보다 자신이 불을 끄고 돌아오기까지 기다려준 승객들에게 공을 돌렸습니다.

버스로 돌아와 ‘기다리게 해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노씨에게 승객들은 오히려 “수고하셨다”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버스로 돌아오기까지 30분 가량 걸렸는데, 어느 분 하나 불평하지 않고 기다려주셔서 고마웠다”고 전했습니다.



어쩌면 큰 화재로 이어질 수 있었던 순간, 버스기사는 망설이지 않고 화재현장으로 달렸고 승객들은 그의 행동을 지지했습니다. 버스기사의 용기와 순발력, 그리고 승객들의 기다림 덕분에 대형 화재를 막을 수 있었던 겁니다.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리면서 노씨와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나눴다고 합니다.

설날을 하루 앞둔 그날, 저 멀리 불길을 남일로 여기지 않고 달려간 버스기사의 행동과 자신들의 시간을 조금씩 내어 놓은 승객들의 배려가 서로에게도 진정한 ‘복된 경험’이 됐을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김아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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