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경미] 작품보다 번역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김경미] 작품보다 번역

입력 2009-06-1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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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메일을 받았다. 지난해 가을에 참가했던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IWP)의 편집장이 보내온, 계간 웹진 '91st Meridian'에 내 영역시 두 편을 게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젠 미국에서의 한국시집 영역 발간이 드물지 않다. 겨우 두 편짜리 웹진 게재 소식이야 밝히기도 부끄럽다.

하지만 36개국의 작가들이 3개월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매일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했었다. 그 작품들 중에서 일단 유일하게 실렸으니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금이 헛된 것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번역의 중요함을 짚어보고 싶어 부끄러운 숫자나마 꺼낸다.

프로그램에 참가할 때 번역해간 내 영역시는 20편가량이었다. 그런데 호숫가 소풍날, 외국작가들이 내가 얘기로만 들려준 다른 시에 관심을 보였다. 시낭송 때 그 시도 꼭 들려달란다. 급히 서울의 한 국제학박사에게 번역을 부탁했다. 나는 급한 부탁을, 그는 문학적이지 않은 번역을 서로 미안해하면서 번역본을 주고받았는데, 막상 읽고 난 미국쪽 편집장 표정이 그저 그랬다. 기분이 좀 상했다.

그러다 문학에의 애정도, 재능도 뛰어난 한국인 교포 여학생이 그 시를 다시 번역하게 됐다. 그녀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후 아이오와대의 유명한 글쓰기 과정을 수강하면서 IWP의 한국작가 지원을 맡고 있었다.

그녀가 새로 번역한 내 시 몇 편을 발표하던 번역수업 시간. 나는 들었다. 내 기분을 상하게 했던 편집장이 혼잣말로 뷰티풀을 연발하는 것을. 나는 정확히 실감했다. '작품보다 번역!'이란 사실을. 영어가 아니라 문학에의 조예가 깊은 전문 번역가의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난해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IWP 프로그램의 대표자인 크리스토퍼 메릴 교수는 인터뷰 때 강조했었다. "최근 미국에서는 중국 문학작품이 많이 읽힌다. 그건 하워드 골드브래트란 뛰어난 번역가 덕분이다. 뛰어난 문학 전문 번역가를 키우는 일이야말로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노벨상을 받느냐 못 받느냐보다 더 다급한 일은 문학전문 번역가에 대한 지원과 육성이 얼마나 이뤄졌는가가 아닐까.

사실 일개 무명시인에 불과한 내가 한국문학의 번역 문제를 운운하는 게 좀 낯 뜨겁긴 하다. 하지만 밖에 나가 보니 우리나라 시 수준이 전체적으로 참 높다. 그런데 좋은 시전문 번역가가 드물어 그 점에서 많은 손해를 보고 있다는 걸 알겠다. 물론 요즘 들어 뛰어난 문학전문 번역가의 발굴과 육성이 늘고 있다고는 한다. 그러나 시전문 번역가에의 육성이나 지원은 여전히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긴 요즘 현대시는 한글로 된 시를 한글로 이해하는 것만도 어려워 죽을 노릇이란다. 그러니 누가 그걸 외국어로 번역까지 하고 싶겠느냔다. 번역이 아니라 시 자체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건데, 정녕 그럴까?

김경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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