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지리산 서북능선에 들다

국민일보

[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지리산 서북능선에 들다

아름드리 주목들 日帝가 모두 베어내 특별보호구역 지정 뒤 자연 되살아나

입력 2014-08-23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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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봉선, 닭의장풀, 은꿩의다리, 이삭여뀌, 돌양지꽃, 바디나물, 뻐꾹나리, 층층잔대, 산비장이, 바위채송화(사진 왼쪽 위부터 오른쪽으로).지리산=구성찬 기자
지리산은 우리나라 다른 산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스케일과 특성, 그리고 상징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80여개의 봉우리들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면서도 물이 풍부해 그 안에 늘 사람들과 마을을 품어 왔다. 마한이 달궁에 세웠다는 산중 왕국, 동학 농민군, 왜란 시절과 구한말의 의병, 한국전쟁 후의 빨치산 등이 지리산을 도피나 항쟁의 터전으로 삼았다.

지난 13일 지리산에 들었다. 탐방객들이 많은 주능선을 피해 서북능선을 걷기로 했다. 서북능선은 남원시와 구례군에 걸쳐 있는 운봉∼바래봉∼팔랑치∼세걸산∼정령치∼만복대∼노고단 구간을 일컫는다. 산덕마을 임도를 따라 팔랑치를 거쳐 우선 정령치까지 가기로 했다. 물봉선, 노랑물봉선, 물레나물, 이삭여뀌, 오리방풀, 짚신나물, 참취 등의 꽃을 봤다.

능선에 올랐어도 전망이 확 트이지 않을 정도로 조릿대와 미역줄 등이 길을 가리고 있다. 철쭉과 산철쭉이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동행한 국립공원관리공단 자원보전처의 오장근 박사는 꽃이 없을 때 진달래와 산철쭉을 구별하는 방법으로 “산철쭉은 잎에 홈이 파여 있고, 잎 양면에 털이 있다는 점이 진달래와 다르다”고 말했다. 잎과 꽃 모두 산철쭉이 남성답다면 진달래는 여성답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서북능선 조망점마다 몰려다니는 구름으로 반야봉과 주능선을 보기는 힘들었다. 해발고도가 1000m 이상의 높은 능선에서 오 박사가 콩알보다 더 작은 빨간 타원형 열매를 따 주었다. 달콤 시큼한 산앵도나무 열매였다. 진달래과의 한반도 고유종으로 키는 1m 정도로 작다. 철쭉의 경우 키가 4m, 밑둥치 지름이 15㎝에 이르는 개체도 보였다. 바위채송화, 꽃며느리밥풀, 바디나물, 마타리, 은꿩의다리, 참좁쌀풀 등의 꽃이 산행의 힘겨움을 달래준다.

‘어머니의 산’ 지리산은 전남·북, 경남 등 3개 도, 5개 시·군, 15개 면에 걸쳐 있다. 그 너른 품 안에서 천연기념물 반달곰, 사향노루, 수달 등 동물 2718종과 식물 1372종이 산다. 지리터리풀, 지리대사초 등 ‘지리’ 접두어가 붙은, 거의 지리산에서만 볼 수 있는 한반도 고유 식물도 16종에 이른다. 사람도 많이 산다. 산의 인문학을 연구하는 경상대 최원석 교수는 “지리산지에는 500개가 넘는 마을에 4만7000여명이 살고 있어 한국의 산지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고 했다. 지리산은 비교적 높은 곳까지 물이 풍부해 논농사가 가능한 덕분이다.

정령치까지 거의 4시간을 걷는 동안 탐방객 6명과 마주쳤을 뿐이다. 산행객들이 성삼재∼천왕봉 주능선 구간에 쏠리면서 서북능선 길은 예전보다 더 한산해졌다. 지리산 서부를 가로지르는 도로들이 포장돼 이동시간이 단축되면서 지리산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아진 탓이다. 지리산은 반나절, 하루, 1박2일 등으로 코스가 다양해졌다. 이에 따라 남원 운봉에서 경남 산청 대원사까지 가는 60여㎞의 지리산 대종주는 이젠 인터넷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개념이 됐다.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등 지리산권 5개 지방자치단체들이 이제는 지리산 케이블카(로프웨이) 건설 계획을 놓고 서로 우리가 더 타당성이 높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주민들이 지리산이 국립공원인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관광지가 되길 원하면 더 편하게 빨리 지리산을 둘러보게 되는 관광객들은 그나마 1박도 하지 않고 도시로 되돌아갈 것이다.

옛날에도 지리산권에 영·호남 구분이 없던 것은 아니나 서로 교류가 잦았고, 외침에 맞서서는 서로 자주 연합하기도 했다. 상인들은 50개 전통장과 벽소령 등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그러나 문명과 교통수단이 더 발달한 지금 지리산권의 지자체 간 단절이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

세걸산에서 정령치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오 박사는 “100년 전에는 이 서북능선에 아름드리 주목이 많았는데 일본인들이 죄다 벌목해 버렸다”고 말했다. 정령치에서 노고단 훼손지 복원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승용차편으로 성삼재로 이동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1994년부터 노고단 정상을 포함해 총 2만6000㎡에 대해 훼손지 복원사업을 펴고 있다. 목재 울타리로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노고단 정상 부근 특별보호구역 안에는 지리산을 대표하는 여름꽃인 노란 원추리와 보라색 둥근이질풀 꽃이 지천이다. 범꼬리, 산비장이, 층층잔대, 구절초, 고추나물 등의 꽃도 보인다.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곰취 군락도 노란 꽃이 한창이다.

복원사업과 자연휴식년제 실시에도 불구하고 한번 망가진 숲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았다. 공단은 2007년부터 정상 일대를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탐방 시간과 성수기 탐방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이후 노고단에 초록색이 되살아나고 있다. 공단은 60%의 식생 복원율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금 지리산에서는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반목하는 산 밑의 기류와 서로 경쟁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결과적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산속의 동식물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