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재벌들의 자식 교육

국민일보

[데스크시각-노석철] 재벌들의 자식 교육

입력 2014-12-18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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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어느 날 LG그룹의 구자경 명예회장과 허준구 명예회장(작고)이 그룹 분리를 위해 마주앉았다. 허 명예회장은 “LG전선과 산전은 우리가 맡겠다”고 했다. LG전선은 허 명예회장과 아들 허창수 회장이 애지중지하며 키워낸 회사였다. 그러나 구 명예회장은 “그건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했다. 허 명예회장은 돌아와 가족회의를 열었다. 가족들은 술렁였지만 허 명예회장은 구 명예회장을 믿고 전격 포기를 선언했다. 이후 LG전선과 LG산전, E1 등은 구 명예회장의 사촌들에게 돌아갔다. 구 명예회장은 집안의 ‘인화’를 위해 사촌들 몫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나중에는 LG정유(GS칼텍스)가 구씨 집안에서 논란이 됐다. “가만히 있어도 돈 되는 정유사업을 허씨 집안에 넘겨야 하느냐”는 게 요지였다. 이에 구 명예회장은 “내가 아까워하는 것을 내줘야 그쪽에서 서운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리했다고 한다.

반세기 동안 두 집안을 이어줬던 ‘신뢰’와 ‘의리’가 위기의 순간에도 빛을 발했다. 이는 LG가문의 엄격한 가정교육에서 비롯됐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며 늘 자식들에게 ‘인화’를 강조했다.

후계자 자질은 가정교육이 밑거름

동원그룹에 인수된 한국투자증권의 유상호 사장은 8년째 대표이사다. 그는 오너가 아니다. 그의 롱런 비결은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에게서 유추할 수 있다. 김 회장은 25세부터 8년간 원양어선을 타다 배 한 척을 구입해 그룹을 일궈낸 정통 ‘마도로스’다. 그는 자식교육에 엄격했다. 장남인 김남구 한투증권 부회장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86년 겨울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4개월간 북태평양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타야 했다. 하루 종일 망망대해에서 중노동을 경험한 그는 바다에서 살아남는 법과 도전정신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배가 출항하면 선장부터 허드렛일을 하는 선원까지 바꿀 수도 버릴 수도 없다”며 신뢰를 중시한다. ‘사람이 곧 재산’이란 게 그의 철학이다. 8년간 이어진 유 사장과의 항해는 가정교육에서 비롯된 셈이다.

삼성과 현대가 얘기도 안 할 수 없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항상 집에 손님이 오면 자식들에게 나와서 인사를 하도록 시켰다고 한다. 계열사 사장이나 임원이 보고하러 와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이 오면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하는 게 예의라면서. 지금도 이재용 부회장은 연장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습관이 배어있다고 한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생전에 매일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무조건 시간에 맞춰 다 둘러앉아야 했고, 누구라도 빠지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가족의 유대감과 예의, 질서를 위해 밥상머리 교육을 이용한 것이다.

오래 방치된 대한항공의 자녀 ‘일탈’

‘땅콩 회항’ 사건으로 궁지에 처한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은 “조현아의 애비로서 너그러운 용서를 바란다. 내가 (자식) 교육을 잘못시켰다”고 사죄했다. 그러나 여론은 여전히 싸늘하다. 조 회장 아들딸들의 ‘월권’이 오래 이어진 탓이다. 4년 전쯤 대한항공을 출입하게 됐을 때 기자들 사이에서 “대한항공은 회장을 4명 이상 모시는 회사”라는 우스갯소리가 들렸다. 왜 그런지 물었더니 “자식들이 회장 행세를 한다”고 했다. 속으로 끓지만 회사 내 어느 누구도 고언을 못하는 듯했다.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조 회장은 자식들의 ‘일탈’을 왜 가만두고 있는 걸까. 철부지들에게 회사를 물려줄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조 회장의 3남매는 순조롭게 경영수업을 받으며 승진을 거듭했다.

요즘 드라마 ‘미생’이 인기다. 지금 시대 청년들은 봉급 200만∼300만원짜리 월급쟁이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스펙 쌓고, 아르바이트로 학비 벌며 고단한 청춘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죽도록 노력해서 기업에 들어간 젊은이들이 곱게 자란 재벌 3세, 4세들에게 수모를 당하면 얼마나 억울하겠나. 그들은 조현아 전 부사장보다 더 치열하게 세상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 최소한 이유 없는 모욕은 주지 말았어야 했다.

노석철 사회2부장 schroh@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