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명호]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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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김명호]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새해에는 집단분노보다 중간지대의 힘이, 甲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확대돼야”

입력 2015-01-02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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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지나가리라.’ 유대경전 주석서 미드라시(Midrash)에 나오는 경구다. 미드라시는 유대교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성서 본문을 해석하고 설명해 놓은 것이다. 다윗 왕이 전쟁에서 이긴 뒤 궁중의 보석 세공사에게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반지에는 “내가 승전해 기쁨이 넘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고 주문했다. 세공사가 반지를 만들었으나 적당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로운 솔로몬 왕자에게 의견을 구했다. 솔로몬이 대답한 것이 바로 이 구절이라고 한다. 성공했거나 승리한 순간에 이 경구를 보며 자만심을 경계하고, 실패하고 낙심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지라는 뜻이다.

솔로몬이 쓴 것으로 알려진 구약 성경 전도서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형통할 때는 기뻐하고 곤고할 때는 되돌아보라.’ 비슷한 맥락이다. 순조로울 때에 감사하는 마음을, 난조를 보일 때에 반성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뜻이겠다. 솔로몬은 당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온갖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린 왕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 솔로몬이 전도서의 첫 구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썼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채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 모든 부와 명예는 결국 의미 없는 것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무상(無常)이란 표현도 있다. ‘모든 것이 덧없다’거나 ‘일정하지 않고 늘 변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쓰인다. 다 눈 앞의 권력, 이익, 명분 따위에 무게를 두지 말라는 뜻일 게다.

분노 모멸감 먹먹함 불통 갑질 무책임 미생 찌라시 재벌3세 비정규직…. 지난 한 해 동안 신문 기사나 칼럼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단어들이다. 특히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사회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들이 아닌가 싶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갑과 을이, 위 세대와 아래 세대가, 좌파와 우파가 곳곳에서 충돌한다. 양쪽의 주장과 명분은 다 그럴 듯하다. 하지만 본질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각자의 이해관계 때문인 것이 적지 않다. 기득권층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렇지 않는 이들은 빼앗기 위해 총력전이다.

뿌리는 깊다. 권력층, 가진 자, 이른바 한국의 ‘윗물’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사례는 열거할 필요가 없겠다. 앞에서 표현된 단어들은 아랫물이 윗물의 비정상에 대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치받거나, 윗물의 권위가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정황들이다. 일부 권력층이나 재벌들의 부패와 탐욕이 켜켜이 쌓여진 결과다. 세월호 참사 때의 무책임과 이익만의 극대화, ‘땅콩 회항’에서 보는 천박성과 갑질, 이런 것들이 같은 선상에 있다.

그런데 최근 한국사회에서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집단분노다. 무조건적인 매도, 무분별한 반(反)기업 정서, 합리적 권위의 불인정 등은 슬슬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어느덧 ‘약자 마케팅’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약자는 정의, 강자는 불의’라는 단순 도식이 먹혀들어갈 정도다. 합리성이 결여된 집단분노는 의견을 달리하는 또 다른 집단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이성적 판단은 배제된 채 진영 논리로 간다. 이런 걸로 이득을 보는 이들은 각 진영의 강경 이데올로그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제는 중간지대가 절대 필요한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 토론이나 협상, 양보, 기득권 내려놓기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그런 정치적 사회적 욕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당연한 이치다.

그런 뜻에서 새해에는 분노 모멸감 갑질 같은 단어가 신문에서 사라지기를 희망한다. 약자 설움 한(恨), 이런 표현도 없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집단분노가 가라앉고 합리적 중간지대의 힘이 커지기를 기원한다. 새해에는 잘나갈 때 자만하지 말고, 곤경에 처했을 때 용기를 갖도록 되새기고 또 되새기자. ‘이 또한 지나가리라!’

김명호 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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