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달자] 약속이라는 말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신달자] 약속이라는 말

입력 2015-01-16 02:20

기사사진

나는 약속이라는 말을 사랑한다. 그만큼 약속을 존중하고 약속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타자와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자신과의 약속 또한 깊이 새긴다. 나와 약속을 어기면 한 끼 굶기를 걸었던 시절도 있었다. 가끔 약속시간을 터무니없이 어기는 사람이 있다. 1시 약속을 1시30분에 나타나 차가 막히느니, 일이 늦게 끝나서 하면서 별 미안함 없이 들어오는 사람에겐 배신감마저 느낀다.

그러나 가장 큰 배신감은 자신에게 느낀다. 이런 약속의 민감함도 결국은 자신과의 대결구도로 만나고 마는 것이다. 중·고등학생 때 계획표를 많이 만들었다. 나의 계획표는 정말 근사했다. 잠은 3시간밖에 없고 모든 시간이 공부와 집안일 돕기로 짜여 있었다. 음악감상 독서시간도 잘 배려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모범적이고 문학적이고 예술적이었다. 보기만 그렇다는 것이다. 내 계획표는 거의 사기 수준이었다. 계획표에는 공부시간인데 잠자리에 있었고, 독서시간인데 집안일 돕는 시간인데 친구들과 잡담을 하며 놀았다. 이런 일들을 아버지께 들키면서 크게 혼이 났다. 웬만해선 딸들에게 야단을 안 치시는 아버지가 내 계획표를 보시고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를 내셨다.

‘이것은 거짓말 계획표다. 너와의 약속이 더 중요해!’ 나는 그때부터 계획표를 짜지 않았지만 약속이라는 말이 가슴에 꽂혔다. 아버지가 약속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어머니 말고도 다들 잘 아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야단을 치신 건 아닐까. 그 후로도 외지에 사는 딸에게 편지를 하시면 약속에 대한 명언을 보내주시곤 하셨다. 그 또한 자신을 의식한 것일까.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그런 정신적 교훈과 사랑이 그리고 가슴 아픈 당부가 녹아 있었을 것이다. 가슴이 무지 아프다.

약속은 모든 신뢰관계의 첫걸음이다. 고전소설에 나오는 춘향이도 이몽룡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고 심청이도 아버지의 헛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다에 던졌다. 이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새해엔 작은 약속부터 지키는 개인, 가족, 사회가 되기를 빌어본다. 나부터. 과장을 버리고 순수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기를.

신달자(시인)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