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윤석헌] ‘비 올 때 우산 뺏는’ 이유

국민일보

[경제시평-윤석헌] ‘비 올 때 우산 뺏는’ 이유

입력 2015-08-1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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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정확한 수치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는 건 분명한 것 같다. S&P500지수는 미국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500개 우량기업을 선정해 주가지수를 구한 것인데 전체 시장의 상승률을 나타내는 지표로 유용하다. 그런데 500개 선정기업이 줄곧 바뀌면서 기업의 부침을 파악할 수 있고 기업수명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 예일대 포스터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1920년대 67년이던 기업수명이 최근에는 18년으로 감축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2020년에 이르면 S&P500 선정기업에 오늘날 우리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기업이 3분의 2를 넘을 것으로 예측했다.

요즘 한국경제의 주목할 만한 특성 중 하나는 과거 한국경제의 고속성장을 이끈 다수의 기업들이 고령화되면서 구조조정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언론을 장식하는 구조조정 대상 기업 대부분이 설립 후 40년이 지난 기업들로 고령화의 부정적 영향을 무시하기 어려워 보인다. 물론 고령화만으로 기업의 모든 문제를 설명할 수는 없으며, 특히 최근 들어 기술 발전, 중국과 신흥국 기업들로부터의 경쟁 심화, 기업 자체의 과욕과 도덕적 해이 등도 경쟁력 약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주변에 연륜이 쌓일수록 욱일승천하는 기업들이 많은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성장 패러다임 변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고령화 기업들의 문제가 마치 유동성 문제에 불과한 듯 가볍게 처리하려는 접근방식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은행들을 겨냥한 금융감독원장의 ‘비올 때 우산 뺏기’ 자제 요청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은행들은 우산에 여유가 많지 않다. 그래서 빌려준 우산을 회수하지 않으면 또 다른 고객, 즉 미래성장을 위한 새싹 기업들에 우산을 빌려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애당초 우산은 구경도 못 해보고 비를 맞았던 벤처기업, 미래 성장기업, 중소기업들에 이번에도 우산 배급은 물 건너가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그간 대기업 지원에 동원됐던 우산은 규모도 엄청나게 컸는데, 이렇게 큰 우산이라면 벤처 및 영세기업 수십 개가 비를 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문제의 핵심은 산업과 기업에 대한 판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과연 누구의 몫이고 또 누가 사회적으로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에 대한 답이 당연히 은행이라고 판단하는데,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대출 비용을 은행이 부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은행의 공공성 주장이 있을 것이나 대출이 부실화될 경우 일차적 책임을 지는 곳은 은행이다. 따라서 은행의 판단이 일차적으로 존중되는 게 순리다. 둘째는 정보의 문제인데, 은행은 대출 업무가 주 업무로 정보 창출의 역량과 유인을 두루 갖춘 전문가다. 따라서 정보의 비대칭성 아래서 이를 살려 나가는 게 사회적으로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감독 당국은 대출 회수가 하도급업체 등의 줄도산 촉발을 우려할지 모르나 오늘 부실기업 정리의 유예가 내일의 큰 부실로 귀결될 수 있음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만약 위기상황이 아니라면 개입을 자제하는 게 건전성 감독이라는 스스로의 책무에 충실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수많은 하도급업체를 거느리는 부실 대기업 지원에 대한 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어 새싹들에게 공급할 물을 소진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양자 간 선택은 금융회사에 맡기는 게 옳을 것이다.

윤석헌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