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남도영] 정주영 공약은 재미있었는데

국민일보

[세상만사-남도영] 정주영 공약은 재미있었는데

논리 다소 부실하지만 상상력 자극해 좋아… 3당 ‘최저임금 1만원’ 총선공약 내걸었으면

입력 2016-02-0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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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가장 신선했던 공약은 1992년 14대 대선 당시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의 ‘반값 아파트’였다. 초·중학교 전면 무료 급식, 2층 고속도로 건설 등도 정주영 공약이었다. 24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정주영 공약은 귀가 솔깃하다. 반값 아파트 공약은 약간 허황된 공약으로 간주됐다. 많은 전문가들은 주먹구구식 ‘정주영식 계산법’에 따른 공약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약 논리가 부실했다는 증언들이 많다. ‘토지개발이익에서 30%, 인허가 관련 로비 비용에서 15%, 원가절감·공기단축으로 10%를 줄이면 당시 공급가의 45% 수준에서 반값 아파트가 가능하다’는 게 정 후보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쉽게 말해 땅값 수익과 로비 비용을 없애버리면 반값이 가능하다는 단순한 논리였다. 반값 아파트 공약은 2006년 홍준표 서울시장 후보가 다시 한 번 들고 나왔지만, 잠시 논쟁만 됐을 뿐 서울시민들로부터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초·중학교 전면 무료 급식은 현재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은 ‘형편이 어려운 초등학생들만 공짜로 급식하겠다’며 주민투표까지 했다가 사퇴했다. 아직 우리나라 모든 중학생들은 무상급식을 먹지 못한다. 정주영 후보는 대선에서 388만67표(득표율 16%)를 얻어 3위로 낙선했다. 정 후보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반값 아파트나 무상급식이 제대로 됐을 것 같지는 않다. 현실은 정주영 공약이 실현될 만큼 녹록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정주영 후보가 당선됐다면 아파트 값이 어떻게 됐을까’ ‘초·중학생들은 지금쯤 무상급식을 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은 재미있다.

허황된 공약은 많았지만 정주영식 공약만큼 생명력이 긴 공약은 많지 않다. 현실을 두세 단계 뛰어넘는 상상력과 정주영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 때문일 것이다. 정주영 회장을 보좌했던 현대그룹 출신 직원을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당선됐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값 아파트 했을 겁니다”라고 했다. 왠지 그랬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나라 올해 최저임금은 시간당 6030원이다. 하루 8시간 일하면 4만8240원을 받고, 주당 44시간 일하면 월 136만2780원을 받는다. 10년 전인 2006년 최저임금이 3100원이었다. 매년 꾸준히 올랐다. 노동계가 요구하고 정치인들도 힘을 보태고 정부도 인정해서 올랐다. 10년 만에 2배가 됐다. 그런데 조금 더 확 올리면 나라가 망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안 된다고 한다. 나라 경제가 휘청일 거라고 한다. 그런데 담뱃값을 2배로 올려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 물론 담뱃값 인상은 별도 문제다. 하지만 최저임금은 안 된다는 논리는 또 무엇인가.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로 경선 중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공약은 7.25달러인 최저임금을 15달러(1만8255원)로 2배로 인상하는 것이다. 많은 미국 경제 전문가들이 샌더스의 최저임금 공약을 우려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인이 반드시 전문가 말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니다.

김무성 대표든 문재인 전 대표든 안철수 공동대표든 “내년에는 우리나라도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무조건 올리겠다”고 약속하면 좋겠다. 포퓰리즘 논란이 일겠지만, 최저임금 1만원은 포퓰리즘이라기보다는 생존의 문제에 더 가깝다. 젊은 세대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정치가 젊은 세대에 무관심하다. 정말 듣고 싶은 정치인의 약속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들인데 요즘은 그런 자극이 도통 없다. 신문을 들여다봐도 통합 개혁 혁신 변화 희망 같은 말만 가득하다. 좋은 말이지만 그런 말로는 가슴이 뛰지 않는다. 남도영 산업부 차장 dy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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