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대추씨와 두 번째 담화문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대추씨와 두 번째 담화문

입력 2016-11-06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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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충북 보은에서 대추농사를 하는 친구로부터 대추 한 상자를 받았다. 대추를 보고 안 먹고 그냥 지나치면 늙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훌륭한 과일인데, 제사상에 오르는 대추가 생각나서 그런지 평소엔 잘 안 먹는 과일이다. 하지만 말리기 전의 생대추를 한번 맛보면 절대 하나만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달다. 그런 대추를 먹으며 올가을 추악한 뉴스 속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은 이 대추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광화문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께에 들고 있었던 촛불이 꼭 보은 대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어지러운 시국에 대추와 관련해 우리 집에도 작은 불상사가 있었다.

친구가 보낸 대추를 맛본 남편이 씨 발라 먹기 귀찮다는 이유로 과육이 남은 씨를 두 살 된 강아지에게 던져준 것이다. 나는 대추를 먹으며 양끝이 뾰족한 대추씨는 강아지가 먹어선 큰일 나겠다 싶은 생각을 하던 중, 남편이 무심코 던져준 대추씨를 강아지가 삼키는 것을 목격하고는 엄청 화가 났다. 나에겐 큰일이라 여겨지는 일이 남편에겐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것에 화가 났고, 이런 사소한 일로 내 강아지를 잃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화가 났다. 당장 동물병원에 가면 의사들은 장천공이 있을 수도 있으니 수술하여 강아지 뱃속에서 대추씨를 꺼내자는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동물병원 검사비나 강아지 개복 수술은 의료보험 적용이 안 되어 그 비용이 굉장히 비싸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아지는 천진한 눈망울을 말똥말똥. 평소와 다르지 않게 놀고, 먹고, 자고, 싸고. 강아지가 배변할 때마다 나는 특별검사 조사원처럼 비닐장갑을 끼고 개똥을 주무르며 샅샅이 뒤졌지만 대추씨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나흘 만에 쭈글쭈글한 대추씨가 든 똥을 쌌다. 퉁퉁 부은 얼굴의 대통령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됐나”라는 말을 하던 두 번째 담화문이 발표되던 순간이었다.

글=유형진(시인), 삽화=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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