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채수일] 짠맛을 잃은 소금

국민일보

[바이블시론-채수일] 짠맛을 잃은 소금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惡을 소멸하지 못하는 교회는 교회 아냐

입력 2017-02-0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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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마태복음 5장 13절) 마태의 이 말씀은 오랫동안 크리스천이 세상 안에서 도덕적으로 돋보이는 행실을 해서 전도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크리스천은 소금처럼,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하고, 필수품인 소금처럼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맞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말씀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는 것은 형용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덩어리나 가루로 있든지, 아니면 물에 타서 보이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짜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본질적으로 짠맛을 가지고 있고, 짜지 않은 소금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형태가 달라진다고 해서 소금이 결코 짠맛을 잃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도 아시고 계셨을 텐데, 굳이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맛을 되찾게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우리는 예수께서 소금의 물질적 기능을 빗대어 제자들이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이 아니라, 제자로서의 ‘정체성 상실’을 경고한 말씀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형태가 달라질지라도 소금이 짠맛을 결코 잃을 수 없듯이, 삶의 방식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아니 변해서는 안 되는 ‘제자다움’을 잃어버릴 수 있는 제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소금을 빗대어 이런 경고의 말씀을 하신 까닭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 말씀이 산상설교가 막 시작되는 부분에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마 5:11). 모욕과 박해와 비난 앞에서 ‘제자다움’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흔들리는 제자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마 5:12)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을 ‘예언자들’과 동일시하십니다.

예언자, 이들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탐욕으로 타락한 권력을 비판하고, 죄악과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을 일깨운 예언자처럼, ‘세상의 소금’인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쓸데가 없어 길에 버려져 사람들의 짓밟힘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소금의 역할을 세상 안에서 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존재 자체가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짜지 않은 소금이 있을 수 없듯이 예언자 아닌 예수님의 제자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병행말씀이 있는 누가복음도 이 말씀 직전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배치함으로써 세상의 소금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존재보다 기능으로 이해하는 교회는 필요에 따라, 아니 자기 이익에 따라 언제든지 제자다움, 곧 정체성을 바꾸거나 박해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제자다움을 포기합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은 제자다움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이렇게 ‘짠맛을 잃은 소금’ 같은 교회의 마지막 운명은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것입니다. 불과 마찬가지로 소멸하는 힘과 정화하는 힘이 있는 소금(민 31:22∼23)처럼 세상의 악을 소멸하고 정화하지 못하는 교회는 더 이상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

아직 살만한 세상